2024-08-16
양사조물박물관의 ‘허산수 정원’은 중국 디자인 파워 리스트에 등극하고 독일 레드닷 어워드를 수상했다.
양밍제(楊明潔)는 중국의 걸출한 제품 디자이너이다. 그는 독일 레드닷, IF 디자인 어워드, 일본의 G-mark, 미국의 IDEA 등 굴지의 디자인 공모전을 휩쓸었을 뿐 아니라, ‘아시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디자이너’ 은상을 수상하고 <포브스>지가 선정한 ‘중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디자이너’ 에도 선정됐다.
그의 화려한 경력 뒤에는 탄탄한 국제적 배경이 자리하고 있다. 젊은 시절 저장(浙江)성 항저우(杭州)의 중국미술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한 뒤, 독일 WK재단에서 전액 장학금을 받아 유학길에 올랐다. 독일 유학 경험이 디자인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눈을 현혹시키지 않는 단순함’을 추구하는 디자인 스승을 만나 디자인의 본질이 화려한 장식이 아닌 기능성에 있음을 깨달았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디자인 노선을 변경했다. 공부를 마치고 독일 지멘스 본부장까지 역임하며 유럽 디자인계에서 실전 경험을 쌓았다.
중국 국·내외를 아우르며 중국 산업 디자인 수준을 끌어올린 양밍제의 홈·가구 디자인
15년 전만 해도 중국과 독일의 디자인 격차는 상당했다. 당시 양밍제는 독일에서 충분한 경력을 쌓고 있었다. 그는 독일에서 배운 것을 고국에서 실현하고 싶다는 열망으로 중국으로 돌아왔다. 귀국 후 YANG DESIGN이라는 스튜디오를 설립해 중국의 제품 디자인 프로젝트들을 맡게 된다. 그가 디자인한 제품들은 중국 출신 디자이너의 작품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형태가 단단하고 간결하며 기능에 충실한 것이 특징이다.
대표작 중 하나인 ABSOLUTE 병 디자인은 단숨에 양밍제를 유명하게 만들었다. ABSOLUTE는 매번 각국의 신예 디자이너를 선정해 술병의 패키지 디자인을 맡기는데, 대부분 디자이너가 종이 그래픽 라벨을 디자인하는 데 그쳤다. 그러나 양밍제는 종이 라벨이 아닌 ABSOLUTE의 패키지 구조 자체를 새롭게 디자인해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병 사이에 홈을 파 소비자가 들고 다닐 수 있는 손잡이를 만들었고, 포장재도 반투명 소재를 사용해 술병 안의 글씨와 겉포장지의 글씨가 겹쳐보이는 시각적 효과를 선보였다. 이 디자인은 단순한 그래픽 개선을 넘어 술병의 구조를 새롭게 제안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중국 국·내외를 아우르며 중국 산업 디자인 수준을 끌어올린 양밍제의 홈·가구 디자인
양밍제는 중국의 전통을 잊지 않고 제품 디자인에 접목하고 있다. 도자기 찻잔 브랜드를 위해 디자인한 다기 세트는 현대식 차 주전자의 구성을 띠면서도 중국 전통 재료인 대나무와 석기를 절묘하게 혼합해 새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대나무의 은은한 결과 돌의 거친 질감의 조화가 인상적인 다기 세트다.
최근 양밍제는 ‘양사(羊舍)’라는 수공예 라이프스타일 브랜드를 선보이며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 그가 설립한 YANG DESIGN 스튜디오가 주로 대량생산 제품 디자인에 초점을 맞췄다면, ‘양사’는 중국의 전통 수공예를 재해석하는 데 중점을 둔다. 이를 위해 그는 장쑤(江蘇) 쑤저우(蘇州)에 ‘양사조물박물관(羊舍造物博物館)’을 설립해 쑤저우 원림(園林)에서 모티브를 얻은 신개념 박물관을 대중들에게 선보였다.
실용적 산업 디자인의 표본을 보여주고 있는 양밍제의 모빌리티 콘셉트 디자인
특히 양사조물박물관의 ‘허산수정원(虚山水庭院)’은 양사에서 제작한 수많은 유닛의 조합과 중국 전통 정원의 조화를 엿볼 수 있다. 이 정원은 동양 철학의 ‘허(虚)’와 ‘가상현실’을 결합한 새로운 디자인 개념을 제안한다. 흰색 그물처럼 얽혀 짜인 유닛의 소재는 현대적이지만, 외관 디자인은 동그랗게 창을 내는 전통적인 차경 기법을 따르고 있다. 공간은 유닛들의 집합체로, 멀리서 보면 빈틈없이 꽉 채워진(實) 흰 외벽처럼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텅 비어 있다(虚). 이 정원의 겉모습은 서양의 기하학적 디자인 문법을 따르지만, 안에는 노자의 ‘허(虚)’ 철학을 내포하고 있어 독일에서 유학했지만 중국의 뿌리를 잊지 않은 양밍제의 정체성을 보여준다. 양밍제의 또 다른 작품 ‘죽지광(竹之光)’은 중국 전통의 상징인 대나무를 현대적 원형 램프로 재해석했다. 이 작품은 겉으로는 서양의 모던함을, 속으로는 중국의 정신을 담아내며 양밍제 특유의 디자인 철학을 잘 보여준다.
이탈리아 밀라노 다빈치 박물관에 전시된 ‘오로라 랜드(Aurora Land)’
그는 가상현실의 미래가 도래할수록 사람들이 ‘만질 수 있는’ 전통으로 돌아가고자 할 것으로 보고 있다. 미래와 전통, 디지털과 수공예 사이에서 그는 새로운 제품 디자인의 가능성을 모색하며 중국 디자인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있다.
글|황윤정(한국) 사진|YANG DESIGN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