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8-16
하얀 솜털이 송송하고 은빛 바늘과 같이 뾰족해서 이름 붙여진 백호은침
여름이다. 외출했다가 집에 돌아오면 등줄기를 타고 땀이 주르륵 흐른다. 때론 티셔츠를 적시는 땀이 반가울 때가 있다. 나는 이 순간을 위해 여름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여름이 오면 나는 백호은침(白毫銀針) 차통을 꺼내 든다. 차통에 쓰인 연도를 확인하고는 손가락으로 하나, 둘, 셋 햇수를 가늠한다. 이제 7년째구나. 딱 마시기 좋은 백차가 됐다.
백호은침 차통을 차판 앞으로 가져다 두고 물을 끓인다. 더운 날씨에 뜨거운 차를 마시는 게 곤욕이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음, 즐거운 곤욕이랄까. 티포트에 물 끓는 소리가 나면 차통에서 백호은침 잎을 꺼낸다. 꺼낼 때부터 올라오는 청량한 향이 코끝을 간지럽힌다. 보송보송한 잔 털이 찻잎을 감싸고 있는 모양새가 영락없이 아기 엉덩이 같다. 뾰족한 찻잎을 조심스레 덜어서 색을 살핀다. 작년보다 더 노랗게 익었구나. 맛이 좋을 게 틀림없어. 차를 우리기도 전에 입안은 벌써 침으로 가득하다.
여름에는 왜 백차(白茶)를 마실까. 백차는 중국 민간에서 널리 마셔온 차로 몸의 열을 내려주는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아이들이 몸에 열이 날 때 해열의 용도로 백차를 우려 먹이는 중국인들이 많다. 그만큼 효능을 어느 정도 인정받고 있다.
백차는 보이차(普洱茶)나 우롱차(烏龍茶)처럼 제다 과정이 복잡하지 않다. 민간에서도 누구나 쉽게 만들 수 있고 쉽게 마실 수 있는 차다. 그래서 중국에서 백차는 예로부터 ‘백성들이 마시는 차’로 인식되어 왔다. 제다 과정이 복잡하지 않기 때문인지 6대 다류 중에서도 가격이 저렴한 편에 속한다.
언제부터인가 백차는 몸의 열을 내려주는 것 외에도 몸속의 불순물을 배출해 주는 효과가 있다는 소문이 중국 전역에 돌았다. 이 때문에 백차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과거에는 아주 저렴하게 마실 수 있던 백차가 이제는 10만 원(약 500위안)이 훨씬 넘는 가격에 거래된다. 오랫동안 차를 마셔온 중국 차우들은 백차를 마시지 않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어린 시절 학교 앞에서 50원 주고 사 먹던 떡볶이를 이제 프랜차이즈 상점에서 2만 원에 사 먹어야 하는 심정과 같은 거겠지. 그러거나 말거나 지금도 백차 가격은 매년 꾸준히 오르고 있다.
백호은침은 유리 차호로 우리는 것이 더 매력적이다.
백차가 인기 있는 이유는 또 있다. 녹차(綠茶)나 홍차(紅茶)와 달리 백차는 오래 묵힐수록 맛이 더해지고 가치도 높아진다. 중국에서 보이차가 인기를 얻던 것과 마찬가지로 백차의 보존성이 부각되자 일부 애호가들이 마구잡이로 사재기에 나서는 현상이 생기기도 했다. 돈이 많은 중국인은 뭔가 사 모으는 것을 즐기는 것 같다. 백차도 그들의 수집 목록 중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중국에서는 백차를 일컬어 ‘백차일년차삼년약칠년보(白茶一年茶三年藥七年寶)’이라고 한다. 풀이해 보면 ‘첫해는 차일 뿐이고 3년 묵으면 약이고 7년 차는 보배다’라는 뜻이다. 백차 차통 앞에서 손가락을 헤아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3~5년 묵힌 백차도 맛이 훌륭하지만 이 표현이 머릿속에 박혀서인지 꼭 7년을 묵혀서 먹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백차의 제다 과정을 보면 왜 백차가 백성의 차인지 알 수 있다. 일반적인 차의 제다 과정은 다음과 같다. 찻잎 따기 → 시들리기(그늘 또는 햇볕에서 수분 빼기) → 덖기(찻잎을 솥에 굽기) → 비비기(유념·찻잎 모양 만들기) → 말리기. 그런데 백차는 이 기본 과정 중 ‘찻잎 따기 → 시들리기 → 말리기’ 세 공정만 거친다. 덖기 과정을 생략한다. 이 때문에 차를 묵힐수록 차가 더 깊어지는 특징이 생기는 것이다.
덖기 과정이 빠진 것은 덖기가 상당히 수준 높은 공정이다 보니 백성들이 편안하게 마시는 차인 백차에 사용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재미있는 것은 이런 특성이 오히려 백차의 가치를 높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백차는 제다를 한 첫해에는 녹차만큼 강한 맛을 내지 못하지만, 오래 묵힐수록 은은한 단맛과 특유의 청량함이 깊어진다.
백차 중에서도 으뜸은 ‘백호은침’이다. 중국어로는 ‘바이하오인전’이라고 부르는데 한국에서도 인기 높다.
‘백호의 여행’ 백호은침은 오로지 싹으로만 만들어 싱그럽고 화사한 향이 특징이다.
차는 대체로 싹으로 만들면 값이 나간다. 싹은 채엽하기도 어렵지만 차로 만들고 나면 중량이 크게 줄어든다. 그래서 같은 양이라고 해도 싹으로만 만든 차는 값이 더 나가는 경향이 있다.
백호은침은 오로지 싹으로만 만든 백차다. 이름을 보면 그 모양새가 머릿속에 그려진다. ‘하얀 털로 뒤덮인’(백호) ‘은색 바늘’(은침)이라는 뜻. 이름만 보면 뭔가 무협지에 나오는 무공 고수 같지만 그 맛은 이름과는 반대다. 맛은 화사하고 향은 싱그럽기 그지없다. 보송보송한 털이 찻잎을 뒤덮고 있어서인지 어딘가 모르게 귀엽다. 호랑이(백호)보다는 배추흰나비처럼 여려 보인다고 하는 게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백호은침은 자사호나 자기로 된 홍차 티 포트보다는 속이 훤히 비치는 유리 차호로 우리는 것이 좋다. 차를 우려 보면 그 이유를 단박에 알 수 있다. 백호은침은 물을 부으면 세로로 반듯하게 서서 차호 안을 둥둥 떠다닌다. 언젠가 〈디스커버리〉 채널에서 본 해마의 모습을 닮은 것 같기도 한데, 그 모습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잡념이 사라지면서 머릿속을 비울 수 있다. 불멍을 하듯 ‘차멍’을 하게 되는 것이다.
백호은침을 마시면 이상하게 찻물은 뜨거운데도 몸이 시원해지는 느낌을 받는다. 열을 낮춰준다는 말이 사실인 것 같다. 차를 다 마시고 난 후 차호와 찻잔에 남은 향을 맡으면 은은한 잔향이 올라와 더위가 말끔히 가신다.
백호은침은 200년 역사를 가진 비교적 젊은 차에 속한다. 청나라 7대 가경제(嘉慶帝)가 즉위한 1796년 처음 만들어진 것으로 전해지는데, 중국인들은 그 수려한 외관과 화사한 향 때문에 백호은침을 ‘백차계의 미녀’ 혹은 ‘백차의 여왕’으로 불렀다.
가장 유명한 산지는 푸젠성 푸딩(福鼎), 저룽(柘榮), 정허(政和), 쑹시(松溪), 젠양(建陽) 등이며 특히 푸딩의 백호은침이 유명하다. 1982년 중국 상업부로부터 전국 명차 30종 중 하나로 선정됐으며, 1990년 제2, 3회 전국 명차품평회에서 연달아 명차로 선정됐다. 물론 이름 좀 들어봤다 하는 중국차는 죄다 명차 타이틀을 달고 있으니 이것이 그다지 중요한 것은 아니다.
백호은침은 서호용정 만큼 대중적인 맛을 가지고 있는데, 여름의 별미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매력 넘치는 차임에는 분명하다.
살이 통통하게 오른 봄 찻잎으로 우려낸 최상급 백호은침
백호은침을 만드는 과정을 살피다 보면 이 여리디여린 찻잎이 한층 더 사랑스러워 보인다. 최고 등급의 백호은침은 봄에 처음 딴 싹과 두 번째 딴 싹을 사용한다. 싹의 크기가 2~3cm 크기가 되면 채엽하는데, 봄에 딴 찻잎만 쓰는 이유가 있다. 여름과 가을에 딴 싹은 충분히 살이 오르지 않아 백호은침을 만들기에는 적절치 않아서다.
백차는 제다 과정이 상대적으로 단순하지만, 그래도 만드는 데 상당한 내공이 필요하다. 앞서 ‘살이 오르지 않았다’는 표현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살이 올랐다는 표현은 말 그대로 잎이 통통하게 부풀었다는 것을 말한다. 이게 왜 중요하냐면, 백차는 덖는 과정 없이 시들리기와 말리기만으로 찻잎의 수분을 조절해야 한다. 찻잎의 수분 함량을 함수율이라고 부르는데 찻잎의 함수율이 10~30% 됐을 때 햇볕에 완전히 말리거나 약한 불에 구워 백차를 완성한다. 이제 왜 살이 통통하게 오른 봄 찻잎으로 최상급 백호은침을 만드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시중에는 정말 많은 종류의 백호은침이 돌아다닌다. 이들 모두 이런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다면 좋겠지만, 사실 이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괜찮은 백호은침을 고르기 위한 팁을 소개하고 싶다. 좋은 백호은침은 찻잎에 윤기가 흐르고 너무 바싹 마르지 않은 것이어야 한다. 처음에는 이를 구분하기가 쉽지 않겠지만 제대로 된 백호은침을 맛본다면 단박에 확인이 가능하니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간만에 에어컨을 끄고 창문을 열었다. 투명한 유리 차호에 백호은침을 우려 놓고 쨍쨍하게 내리쬐는 해를 보고 있다. 어디선가 후텁지근 바람이 불어와 목덜미를 감싼다. 등에 난 땀으로 티셔츠가 젖었다.
백호은침 한 모금을 머금는다. 입속이 따뜻해진다. 목으로 넘긴다. 찌르르르. 어딘가 시원해지는 느낌이다. 그래 이 맛이지. 무더운 여름날 마시는 백호은침 한 잔. 다인에겐 이게 여름의 묘미고 인생의 재미 아닐까. 이 맛을 몰랐다면 약간은 억울했을거다. 나는 또 이렇게 여름의 어느 하루를 즐기고 있다.
글 | 김진방(한국) 사진 | 인공지능(AI) 생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