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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공화정의 만가(輓歌)


2022-09-01      

기원전 206년, 중국에서 초나라와 한나라가 전쟁을 벌일 때 로마는 카르타고와의 제2차 포에니전쟁이 한창이었다. 50여 년의 노력 끝에 로마는 마침내 카르타고를 멸망시켰고 마케도니아를 와해시켜 지중해의 패주가 됐다. 중요한 점은 패권 쟁탈 과정에서 로마는 시종일관 공화제를 유지했다는 것이다.


토지, 내전과 제정(帝政)

고대 그리스 역사가 폴리비오스는 로마가 성공한 이유는 ‘혼합 정치제도’를 시행해 왕권제, 귀족제, 민주제를 융합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집정관은 왕권을 대표해 대외 군사권을 장악했고, 원로원은 귀족을 대표해 재산권을 장악했으며, 민회는 민주를 대표해 부결권을 장악했다. 세 힘이 서로 견제하며 균형을 이뤘다.


기원전 1세기, 로마 내부의 권력 균형이 깨지고 로마는 ‘내전 시기’로 진입했다. 기원전 27년 로마는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바뀌었다. 150년 동안 내전을 하지 않았던 로마인이 왜 서로 싸우게 됐을까? 바로 토지 때문이었다.

한 세기 반 동안 이어진 해외 정복에서 로마의 집권자들은 수많은 노예와 재산을 갖고 본국으로 돌아왔다. 이에 대규모 ‘노예 대장원 농업’이 나타났고 이는 소농의 파산으로 이어져 토지 병합이 가속화됐다. 로마의 평민은 점차 빈민이 됐고 결국 유랑민으로 전락했다.


로마에서 왕권, 귀족, 평민의 세 힘 중 가장 강한 것은 귀족이었다. 이탈리아의 역사가 마키아벨리는 “로마 귀족은 평민에게 명예는 양보할 수 있어도 재산은 한 푼도 양보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로마 유랑민들은 결국 군벌에 의탁했다. 군벌만이 대외 전쟁에서 토지를 얻을 수 있었고 군벌만이 원로원을 압박해 사병에게 토지를 분배하도록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국가를 위해 전쟁에 나섰던 공민들이 장군들의 용병으로 변신했다. 정객이 공감대를 얻을 수 없었던 지역에서 군벌이 등장했다.


로마 내전 시기 철학자이자 웅변가 한 명이 나타났다. 바로 ‘로마 공화정의 아버지’ 키케로다.


기원전 63년, 키케로는 로마의 첫 비(非) 귀족 출신 집정관이 돼 정계에 파란을 일으켰다. 그 때문에 죽고, 그 때문에 산 사람도 있었고, 그 때문에 역사에 이름을 남긴 사람도 있었다. 카이사르의 ‘양자’인 브루투스는 키케로를 ‘정신적 아버지’로 삼았다. 키케로에게 ‘폭군을 암살한 자가 진정한 영웅’이라는 사상을 주입 받은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에게 칼을 휘두르며 키케로의 이름을 외쳤다.


카이사르 사후 키케로는 그의 후계자인 안토니우스 대응에 나섰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처럼 독재하려는 생각이 전혀 없었고 원로원과 함께 로마를 다스리려고 했다. 그러나 공화파의 리더로서 키케로는 이를 무시하고 공화파와 군대를 모집하면서 아우구스투스의 반란을 부추겼다.


이때 겨우 19세인 아우구스투스도 안토니우스를 대신하겠다는 생각을 품고 사적으로 3000명의 노병을 모집해 로마로 진군했다. 키케로는 <필리피카(Philippic)”라는 연설을 발표해 아우구스투스의 반역 행위를 ‘공화국 보위’라고 옹호했다. 아우구스투스가 이끄는 군대는 원로원과 협력해 안토니우스를 격파하고 이어서 다시 키케로와 협력해 로마 집정관 경선에 나섰고, 키케로의 선봉에 서겠다고 맹세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는 집정관에 당선되자마자 키케로와 등을 지고 안토니우스와 평화 협상을 진행했다. 안토니우스가 제시한 조건은 키케로의 목숨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동의했다. 그리스의 작가 플루타르코스는 키케로의 마지막 순간을 이렇게 기록했다. “키케로는 미친 듯이 도망가면서 마차 창문으로 머리를 내밀며 추격병을 계속 살폈다. 안토니우스의 병사가 칼을 내리쳐 키케로의 목을 쳤고 키케로가 늘 연설하던 강단 위에 그의 목을 걸었다.”


이는 로마 역사에서 민심을 뒤흔든 비극이었고 공화정의 막을 내리는 만가였다. 키케로 사후 11년 뒤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제국의 초대 황제가 됐다.


자유의 이름으로

막대한 부를 보유한 로마는 어째서 일부를 나눠 빈부 격차를 줄여서 국가 분열을 막지 않았을까? 역사서는 그 이유를 로마 귀족의 사치스러운 생활을 들었다. 하지만 이게 전부가 아니었다. 평민은 파산했지만 여전히 선거권을 갖고 있었다. 로마 집정관은 일 년에 한 번 선발하는데 귀족들은 평민의 표를 얻기 위해 앞다퉈 대규모 행사, 검투 대회와 연회를 열었다.


귀족들이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해도 경선 비용을 대기에는 부족했기 때문에 파산하는 귀족이 많았다. 각지의 재벌이 돈을 대기 시작했다. 재벌들은 원로에게만 투자한 것이 아니라 군벌에도 투자했다. 재벌의 돈이 로마 군대로 끊임없이 흘러가 당쟁이 내전으로 격화됐다. 50년 동안 내전이 4차례 발생했다. 혼란으로 절망한 로마인들은 결국 아우구스투스를 선택해 공화정이 제정으로 바뀌었다.


이는 그들이 자유를 사랑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자유가 그들에게 평등과 부, 안전을 주지 않았고 자유에 관한 공론이 자신들의 근본적인 관심사를 해결해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로마의 빈부 격차 문제, 사병들이 평생 피땀을 바쳐도 토지를 분배받지 못하는 문제, 정경유착 부패 같은 문제들이다. 원로원은 이런 문제의 해결 방법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한 것은 오히려 군벌이었다. 예를 들어 아우구스투스는 군대 기금을 마련해 퇴역 사병들에게 토지와 현금을 주었다. 카이사르도 로마 근처의 폰티노 습지를 수만명에 달하는 빈농에게 경작지로 제공할 계획이었다. 또한 코린토스 운하를 건설해 아시아 상업과 이탈리아 경제를 통합하려고 했다. 그러나 로마 ‘공화정의 아버지’인 키케로는 이 사업을 ‘자유’ 수호에 비해 매우 하찮은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는 독재자의 ‘보여주기식’ 행정의 상징이고 ‘공민의 피와 땀을 뽑고 기꺼이 노예가 되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웅변가들은 ‘자유’를 남용했지만 군벌도 ‘자유’를 남용했다. 군대 지도자들은 ‘자유’는 어떠한 정치적 제약도 받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어떤 파벌이 원로원을 장악하면 반대파는 곧바로 ‘자유를 핍박한다’고 선언하면서 당당하게 군대를 동원해 반란을 일으켰다. 폼페이우스는 마리우스파가 폭정이라고 선언하고 사병을 모집했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당이 자유를 억압한다고 하면서 갈리아 군대를 이끌고 루비콘강을 건넜다. 아우구스투스는 반역에 성공하자 화폐를 주조하고 자신을 ‘로마 인민 자유의 수호자’라고 새겼다. 자유는 각 이익집단이 내분을 일으키는 핑계가 됐다.


어쨌든, 공화 정치가 의견 일치를 이루려면 표결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정치가들이 구조적인 개혁을 진행하는 자기 희생 정신이 더 필요했다. 자유 수호는 언제나 ‘자유’ 자체만이 아니었다.


이 글은 판웨의 <진·한과 로마(秦漢與羅馬)>에서 발췌한 것이다.


글|판웨(潘岳) ,역사학 박사이고 중앙사회주의학원 당조 서기, 제1부원장(장관급)이며 중국공산당 제17차∙제19차 전국대표대회 대표, 중국공산당 제19기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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