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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과거시험의 ‘신선’과 한국


2024-11-29      



한국에서는 매년 11월 대학수학능력시험(이하 수능)이 치러진다. 시험을 보는 학생들은 모두 수능을 통해 원하는 대학에 진학하고 싶어 한다. 수능을 앞두고 수험생들은 ‘대학에 찰싹 붙겠다’는 의미에서 찹쌀떡을 먹기도 하고, ‘시험에서 미끄러질까 봐’ 일부러 미역국을 피하기도 한다. 또 많은 사람들이 종교 장소를 찾아 시험을 잘 보게 해달라고 빌기도 하는데, 이런 행위에는 모두 평범한 사람들의 소박한 염원이 담겨 있다. 옛날에는 과거시험에도 기도를 올리는 대상인 ‘특별한 신선’과 민간 풍습이 존재했다.


중국 과거 제도의 ‘신선’

중국은 아마 세계에서 가장 먼저 시험을 통해 문관을 선발한 나라일 것이다. 수(隋)나라 때 확립된 과거 제도는 송(宋)나라 때 이르러 폭넓게 발전했다. “아침에는 농부였지만 저녁에는 황제의 대청에 올랐다네(朝為田舍郎, 暮登天子堂)”라는 당시의 시구는 과거시험을 통해 운명을 바꾸려 한 일반 백성들의 염원이 잘 반영돼 있다. 옛날 문벌 귀족은 더 이상 관직을 독점할 수 없었다. 이에 따라 과거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거둬 자신의 포부를 펼치고자 했던 중국의 젊은 서생들은 대부분 어릴 때부터 고학(苦學)을 시작하곤 했다. 문창성(文昌星), 문곡성(文曲星), 괴성(魁星)과 같은 과거시험과 관련된 민속과 신앙도 점차 퍼지기 시작했다.


<사기(史記)>에 따르면 문창성은 문운(文運)과 공명(功名)을 관장하는 별자리다. 과거 제도가 점점 흥성하면서 문창성에 대한 신앙도 보편화돼 급기야 문창제군(文昌帝君)으로 신격화되기까지 했다. 문창제군의 이름은 장아자(張亞子)로 재동신(梓潼神)이라고도 하는데 본래 쓰촨(四川) 지역의 신앙이었다. 당(唐) 희종(僖宗)은 황소(黄巢)의 난을 피해 쓰촨으로 들어가 재동묘(梓潼廟)를 지나며 신선의 가호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새긴 뒤 재동신에게 큰 작위를 봉하고 이를 널리 알렸다. 송나라에 이르러 재동신은 과거시험을 관장하는 신으로 발전했고, 원(元)나라 시기에는 원 인종(仁宗)이 재동신을 문창제군으로 봉하면서 문창제군은 전국적인 신앙이 됐다. 명·청(明清)시대에는 거의 모든 학문하는 곳에서 문창제군을 모셨다. 한편, 북두칠성의 하나인 문곡성은 천하의 문운을 관장하는 별로 이 역시 과거시험과 관련이 있다. 옛날 중국인들은 송나라 범중암(范仲淹), 포증(包拯), 문천상(文天祥)과 같이 이름을 날린 대문관(大文官)들의 경우 문곡성이 인간세계에서 환생한 화신(化身)으로 여겼다.


괴성은 다른 말로 규성(奎星)이라고도 한다. 괴성과 규성은 원래 다른 별이었지만, 당·송에 이르러서는 사람들이 이를 구분하지 않게 되었다. 송나라의 문학가 소식(蘇軾, 소동파)은 뛰어난 문재(文才)로 민간에서 ‘규수신(奎宿神)’이라 불렸다. 또 송나라 사람들은 ‘괴(魁)’ 자를 보고 하늘의 신령인 천신(天神)과 땅의 신령인 지기(地祇)의 모습을 상상했다. 한 손에는 붓을, 다른 한 손에는 먹줄통(墨斗)을 들고 있는 귀(鬼) 형상의 신을 떠올린 것이다. 명절이 되면 많은 서생들은 자신의 시험에 운이 따르기를 빌며 괴성의 모습이나 동작을 모방하기도 했다. 장쑤(江蘇) 난징(南京)에 있는 장난궁위안(江南貢院, 강남공원)은 명·청 시기 최대의 과거시험장으로, 그 옆에는 ‘괴성’을 모시는 ‘괴성각(魁星閣)’이 있다. 현재 그 인근에는 과거 제도와 관련된 다양한 문물을 소장하고 있고 과거시험 문화 체험도 할 수 있는 ‘중국과거박물관’이 세워졌다. 역사가 발전함에 따라 문창성, 문곡성, 괴성은 민간에서 구분되지 않고 같은 신으로 여겨졌다.


과거시험의 ‘신선’과 한국의 전설

조선 후기 실학자 이규경(李圭景)은 <괴성재동신변증설(魁星梓潼神辨證說)>에서 한국인들이 ‘괴성’신을 널리 모신다고 언급했다. 하지만 이런 민간 풍습이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알 수 없고, 괴성이 문장(文章)을 관장한다는 사실만 알려져 있을 뿐이었다. 실제 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한국인들은 천문학적 측면에서 규성에 주목하기도 했다. <고려사(高麗史)>에 따르면 명종은 도교 행사에서 친히 괴성을 향해 제를 올렸다고 한다.


고려 시대 문신 이규보(李奎報)의 이름 역시 규성 신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규보의 초명(初名)은 ‘규보’가 아니라 ‘인저(仁氐)’였다. 어릴 적부터 총명했던 그는 9살에 한문(漢文)을 쓸 줄 알아 기동(奇童)으로 소문이 났다. 그러던 어느 날 꿈에 ‘규성신’이 나타나 그에게 과거시험을 보면 장원급제를 할 것이라 전했고 놀랍게도 이는 실제로 이뤄졌다. 그는 아예 이름을 ‘규성이 전한 희소식(奎星報喜)’이란 뜻의 ‘규보’로 바꿨다.


고려 현종 때의 명재상이자 명장인 강감찬은 오랫동안 문곡성의 화신으로 여겨졌다. <고려사>에 따르면 한 관리가 밤길을 가다 하늘에서 큰 별이 민가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 사람을 보내 확인했더니, 마침 그 집에서 남자아이가 태어났다고 했다. 그 아이가 바로 강감찬이다. 훗날 강감찬은 자라서 놀라운 재능으로 과거시험에 장원급제를 했다. 시간이 흘러 고려를 방문한 송나라 사신은 강감찬을 보고 “문곡성을 오랫동안 보지 못했는데 오늘 여기서 만나게 될 줄 몰랐다”고 말했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강감찬이 문곡성의 환생이라고 믿게 됐다.


<숙재집(肅齋集)>의 기록에 따르면 조선 인조 때 남평(南平) 문(文) 씨 부부는 나이 서른이 넘도록 아들이 없어 월출산에 올라 기도를 드렸다. 어느 날 꿈에 한 학을 탄 선관(騎鶴仙官)이 나타나 부부에게 명주(明珠)를 하사하며 “이것은 북두의 문곡성”이라고 말했다. 잠에서 깨어난 부인은 자신이 아이를 가진 것을 깨달았고, 1645년 봄 사내아이가 태어나자 아이의 이름을 천두(天斗), 자(字)는 성칠(成七)이라 지었다. 아이는 기개가 남다르고 영준하며 기품이 뛰어난 인물로 자라났다.


조선 시대 시문에 언급된 과거시험의 신선

괴성과 문창은 시문에서 종종 관직에 비유되곤 한다. 문신 하연(河演)은 타인의 승진을 축하하는 시에서 “이것은 천지조화가 빚어낸 결과다. 모든 이가 규성이 빛을 반짝이며 한림원(翰林院) 전체를 밝게 비추는 모습을 본 듯하다”라고 표현했다. 문신 이시원(李是遠)은 서한석(徐漢石)의 장원급제를 축하하는 시에서 “경성(京城)에서 갑작스레 기쁜 소식을 들었다. 합격자 명단에서 반짝이는 괴두(魁斗)의 빛이었다. 이는 필시 하늘의 뜻일 것이다”라고 썼다. 이와 반대로 문신 홍서봉(洪瑞鳳)은 시에서 ‘혜성이 문창성을 쓸고 지나갔다’라는 표현을 통해 친구의 좌천을 비유했다.


문신 조준(趙浚)은 명나라 사신 주탁(周倬)을 환송하며 “사신께서는 하늘의 문창성처럼 인간 세상의 성교(聲敎, 제왕의 덕으로 백성을 감화시키는 가르침)를 이곳에 남겨두셨다”라는 시를 지어 선물했다. 그는 명나라 홍려사(鴻臚寺)의 관리 임사영(林士英)에게 선물한 시에서도 “마치 문창성이 북극으로 돌아간 듯하며 조선 땅에 성교를 남겨두셨다”라고 썼다. 문인 강헌규(姜獻奎)는 선조의 유지를 받들어 많은 서적을 사들여 소장했다. 그는 책을 좋아하고 소장하는 집안은 반드시 문곡성이 그 후손들을 환히 비춰 가문에서 문학지사(文學之士)가 나온다는 믿음이 있었다. 근대에 이르러 고종은 <경신록(敬信錄)>과 <삼성훈경(三聖訓經)>등 ‘문창제군’과 관련된 경전을 펴내라고 명하기도 했는데, 이는 당시까지도 문창 신앙이 여전히 두터웠음을 말해준다. 1894년, 조선이 과거 제도를 폐지하면서 신선에 대한 신앙도 이에 따라 점차 약화됐다. 하지만 시험 합격을 위해 하늘의 보살핌을 구하던 백성들의 심정만큼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수능에서 한국의 수험생들이 좋은 성적을 거두길 진심으로 기원한다.


글|위셴룽(喻顯龍), 상하이(上海)외국어대학 글로벌문명사연구소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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