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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신화: 오공> ‘성지순례


2024-11-29      

산시성 숴저우시의 응현목탑


당나라(618~907) 멸망 이후 중국 북방 지역은 정권의 난립과 빈번한 교체로 오랫동안 혼란을 겪었다. 특히 요(遼)나라(907~1125) 후기부터 금(金)나라(1115~1234)에 이르는 긴 세월 동안 도읍 주변의 배후지로 있었던 숴저우 땅에는 요·금의 흔적이 깊이 새겨졌다.


지금도 숴저우(朔州)에는 요·금 시기의 건축이나 조각, 회화 등 귀중한 옛 시대의 흔적들이 남아있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이 바로 <검은 신화: 오공>의 배경이 됐던 응현목탑(應縣木塔)과 숭복사(崇福寺) 미타전(彌陀殿)이다.


변방 요새 소수민족 출신 통치자들의 호방한 기상 때문인지 요·금 시대에는 높고 웅장한 건축들이 많다. 건축물에 가만히 다가서면 그 웅대한 기개와 묵직한 역사가 느껴지는 듯하다.


응현목탑 1층의 석가모니 채색 불상


‘살아 숨쉬는’ 응현목탑

“여기 손가락도 들어가요!” 안경을 쓴 남자아이 하나가 응현목탑 바닥층 회랑 바깥 처마의 나무 기둥 아래 쪼그려 앉아 무언가를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나무로 된 기둥과 기둥 아래의 주춧돌 사이에는 확연한 틈이 있었다. 남자아이는 왼손 손목에 찬 시계로 시간을 확인하며 오른손 손바닥을 위로 향해 틈새 사이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손가락 두 마디 보다 더 깊이 들어갈 만한 구멍이었다.


“어제 아침 10시 반에 와서 봤을 때는 나무기둥과 바닥이 꽉 붙어서 손가락이 아예 안 들어갔거든요! 어떻게 된 걸까요?” 남자아이가 신기하다는 듯이 소리친다.


숴저우시 잉(應, 응)현에 위치한 응현목탑의 정식 명칭은 ‘불궁사석가탑(佛宮寺釋迦塔)’이다. 요 청녕(淸寧) 2년(1056)에 건축하기 시작했고 현재 이탈리아 피사의 사탑, 프랑스 에펠탑과 함께 ‘세계 3대 기이한 탑’으로 불린다.


응현목탑은 높이가 67.13m로 건물 20층 높이에 해당하며,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높고 오래된 순수 목조 누각식 건축물이다. 탑신은 10만 개가 넘는 목부재로 이뤄져 있다. 과거 솜씨 좋은 장인들은 나무 블록을 쌓듯 쇠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목재를 맞물리는 장부맞춤 방식으로 탑을 쌓았다.


사료에 따르면 응현목탑은 건립 이후 지금까지 40번이 넘는 지진과 수차례의 전란을 겪었다. 나무 기둥 대들보에는 아직도 무수한 총탄 자국이 남아 있다. 그럼에도 목탑은 여전히 제자리에 우뚝 서서 천 년이 넘는 세월을 견뎌내고 있다.


목탑 외에도 이와 관련된 여러 비화와 전설도 전해 내려온다. 탑 바닥 회랑의 바깥 처마 아래에 있는 24개의 나무 기둥이 번갈아가며 공중에 떠 있는 신기한 현상이 외부에 알려졌다. 비밀을 알아내고자 하는 시민들과 여행객들의 발길이 잇따랐고 심지어 ‘살아 있는’ 목탑의 24개 나무 기둥이 번갈아가며 ‘휴식’을 취하는 것이라는 소문까지 돌았다.


‘공중에 떠 있는’ 나무 기둥이 목탑의 하중 지지력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응현목탑은 평면 팔각형의 형태로 4m 높이의 기단 위에 세워졌다. 정면에서 보면 탑신은 5층 6처마, 1층은 겹처마, 다른 층들은 모두 홑처마다. 하지만 각 층 사이에 암층(暗層)이 끼워져 있어 실제로는  5층이 아닌 9층이다.


고증에 따르면 응현목탑의 지붕을 제외한 다른 모든 층은  기본적으로 동일한 조합 방식이 사용됐다. 탑신은 내부와 외부 두 겹의 나무 기둥이 지탱하며 외부에는 24개의 나무 기둥이, 내부에는 8개의 나무 기둥으로 구성돼 내외부가 맞물린 팔각형의 슬리브 구조를 이룬다. 슬리브 내부는 불상을 모시는 공간, 외부는 사람들이 드나드는 공간이다. 이 밖에도 암층에는 수많은 삼각형 경사버팀재를 추가한 트러스 구조로 한층 견고함을 높였다. 이러한 암층은 대나무가 일정 간격을 두고 새로운 마디가 자라나는 것처럼 시간이 갈수록 목탑을 점점 더 단단하게 만든다.


탑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 보면 여러 개의 두공(斗栱, 목조건축에서 기둥 위로 지붕을 받치며 짜 올린 구조)이 마치 무리 지어 핀 연꽃처럼 처마 밑에 소담하게 피어 있다.


두공은 일반적으로 기둥과 가로보의 접합부에 설치된다. 여러 개의 정사각형 ‘두(斗)’와 구부러진 활 모양의 ‘공(栱)’이 장부맞춤으로 맞물려 하중을 떠받치는 구조다. 두공 사이가 모두 단단히 연결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강풍이나 지진 같은 상황에서 일정한 변위(變位)와 마찰이 발생하며 충격을 일부 흡수해 손상을 방지한다.


이처럼 단단한 이중 슬리브 구조와 두공의 유연한 장부맞춤 구조의 조합으로 보다 완벽하고 견고한 건축물이 만들어진다. 한편, 목탑 바닥층의 첨랑(檐廊, 처마 복도)은 탑신 바깥에 있고 첨랑의 나무 기둥은 그 위의 처마를 받치는 용도로만 쓰이는데, 이런 구조는 탑에 ‘치마’를 입힌 것과 같다. 첨랑 위 나무 기둥이 치마의 모양을 유지하는 버팀대(크리놀린) 역할을 해 목탑 자체의 하중에 거의 영향을 주지 않는다.


응현목탑이 지금까지 보존될 수 있었던 비결은 탑의 절묘한 건축 구조뿐 아니라 한평생 변함없이 탑을 지켜온 사람들 덕분이기도 하다.


“20대 때 목탑에 불이 나는 꿈을 꿨는데 처음 잠에서 깼을 때 온몸이 떨릴 정도로 대성통곡을 했었다. 그 후로도 자주 그런 악몽을 꾼다.” 응현목탑 문물관리원 셰관성(謝關勝, 67)은 그 당시를 회상하며 말했다. 정년퇴직했다가 재임용된 그는 야간 순찰을 시작했다.

 

“띠띠띠띠…현재 시각은 0시 50분입니다.”


알람이 울리며 LED 화면이 밝아졌다. 그는 사무실 겸 숙소로 쓰는 방의 허름한 1인용 침대를 정리하고 스텐인리스 대야에 세수를 했다. 그리고 외투를 걸친 뒤 휴대용 탐조등을 들고 주변 순찰에 나섰다.


“밤에는 혼자 최소 5바퀴씩은 돌고 온다. 기본적으로 30분마다 한 번씩 순찰을 돈다. 위험해 보이는 곳을 발견하면 즉시 처리해야 한다.” 그가 탑 아래 통풍구 쪽으로 몸을 숙여 탐조등을 비춘 곳을 유심히 관찰하며 말했다. “이런 구멍은 기둥을 환기시키고 습기를 막아주기 때문에 인화성 물질이 없는지 꼼꼼히 확인해야 한다.”


그가 목탑과 함께한 지도 벌써 50년이 되어 간다. 목탑은 이미 그의 삶의 중심이 된 지 오래다. “목탑이 나를 떠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내가 목탑 없이 살 수가 없는 것이다. 오랜 시간 함께했기 때문에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다.” 담담하지만 목탑에 대한 애정이 뚝뚝 묻어 나오는 말투였다.


산시성 숴저우시 숭복사의 고건축물 전경


도심에 숨겨진 금나라의 유산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응현목탑과 달리, 숴저우 구도심에 위치한 숭복사는 사람이 북적이는 시가지에 위치한다.


산문(山門)으로 들어가 명·청 시기 재건된 금강전(金剛殿), 천불각(千佛閣), 대웅보전(大雄寶殿)을 지나면 2.5m 높이의 단 위에 올려진 길이 40m, 너비와 높이 20m의 홑처마 팔작지붕 형태의 대전(大殿)이 시야에 들어온다. 숭복사 주전(主殿)인 미타전이다.


미타전 지붕의 녹색 유리 가장자리가 햇빛을 받아 영롱하게 반짝였다. 용마루 양 끝의 치문(鴟吻, 용머리에 물고기 몸통을 지닌 어룡 형태의 중국 고건축 장식물로 어룡이 물을 잘 내뿜기 때문에 화재 예방의 의미를 지님)도 살아있는 듯 생생하다. 척찰(脊剎, 용마루 정중앙의 장식물) 좌우로 두 명의 유리 무사가 다리를 벌려 횡당보(橫檔步, 한쪽 무릎을 굽혀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다른 쪽 다리를 뒤로 쭉 편 전투 준비 자세)를 취하고 두 팔을 가슴에 교차시켜 얹은 채 상당한 위엄을 풍기고 있다. 무사의 높이는 약 1.5m로 중국에서 현존하는 최대의 요·금 시대 호위 유리용(琉璃俑)이다.


미타전은 금희종(金熙宗) 황통(皇統) 3년(1143)에 지어졌다. 법당 내에는 조각상과 벽화, 현판, 조화(雕花, 꽃무늬 조각 문양) 창살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유리 척식(脊飾, 기와 장식) 은 금나라 시대의 ‘오절(五絶)’이라 불린다.


높게 걸려 있는 <미타전> 현판은 금나라 제5대 황제 금세종(金世宗) 완안옹(完顏雍)(1161~1189년 재위) 시기의 유물로 이 역시 중국에서 가장 큰 금나라 현판이다.


거대한 현판 아래에는 높이 약 3.6m의 조화 칸막이가 있다. 건축을 좀 아는 독자라면 어떤 건축물이 어느 시대에 속한다고 할 때, 대개 건축물의 들보를 가르킨다는 것을 알 것이다. 문이나 창문 등의 작은 내부 시설물은 쉽게 손상되고 교체가 쉽기 때문에 종종 최근 연도인 것도 있지만 미타전 정면의 모든 칸막이와 창호는 모두 금나라 건축 당시부터 남겨진 본래의 것들이다. 정교하고 변화무쌍한 패턴과 디자인은 당시 장인들의 기발한 감각과 솜씨를 보여준다. 천년의 세월을 거쳐 좀먹고 부패할 운명을 피해 오늘날까지 살아남은 것은 그야말로 기적이 아닐 수 없다.


미타전에 들어서면 사방 벽면에 펼쳐진 금나라 시대의 벽화가 법당 내부를 더욱 그윽하게 만든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높이가 4.68m에 달하는 천수관음상이다. 보통 사찰 벽화의 천수관음은 천수(千手)의 상징으로 많아야 벽에 20~40개의 손을 그리는데, 당시 미타전의 벽화를 만든 화공은 붓질 하나하나에 정성을 들여 실제로 900개가 넘는 손을 그렸다. 관음보살의 몸을 둘러싼 손은 한 겹씩 바깥으로 확장해 나가는 형태다. 이곳을 방문한 여행객들은 벽화를 보며 자신이 얼마나 미약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지 깨닫곤 한다. 


글 | 리자치(李家祺) 

사진 | VC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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