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2-19
류지영 기자가 베이징 동계올림픽 미디어센터에서 업무를 보고 있다. 사진/본인 제공
“잠시 뒤 ‘냐오차오(鳥巢)’로 이동합니다. 모두 버스에 올라 주십시오.”
2022년 베이징 동계올림픽 개회식이 열린 2월 4일 오전 11시 15분. ‘폐쇄 루프’ 밖에서 올림픽을 취재하는 기자들을 위한 미디어센터가 자리한 베이징국제호텔(北京國際飯店)로 전 세계 특파원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중국 정부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을 우려해 베이징 동계올림픽 입장권을 판매하지 않았다. 대신 외신 기자 등 지정된 인사들에게 관람객 자격으로 참가할 기회를 줬다.
세 차례 검색과 버스 대기 등 과정을 끝낸 오후 5시 30분. 중국에서 활동하는 각국 취재진은 국가체육장에서 진행된 개회식 현장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나는 8살때 처음으로 수영장이 있는 테마파크에 놀러간 적이 있다. 너무 들뜨고 설레서 전날 한숨도 자지 못했다. 그때의 기분이 되살아났다.
4년 전인 평창 동계올림픽 때 한국의 정부 부처인 행정안전부(행안부)를 출입했다. 당시 행안부는 경기장 및 주변 시설의 통신과 안전을 책임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나는 평창에서 경기 자체보다는 올림픽 시설이 정상적으로 가동되는지를 확인하는데 시간을 보냈다. 평창에서 경기를 제대로 관람하지 못해 아쉬움이 컸다. 그런데 뜻밖에도 4년 뒤 중국에서 올림픽의 꽃이라 할 수 있는 개회식을 볼 수 있게 됐다. 너무 신기하고 반가웠다. 중국이 나에게 준 선물이었다.
베이징에서 열린 두 번의 올림픽
베이징에서는 지금까지 두 번의 올림픽이 열렸다. 14년 전인 2008년 8월 8일 열린 베이징 하계올림픽 개회식 때 나는 회사에 입사한지 얼마 되지 않은 사회 초년병이었다. 당시 행사는 공연 인원만 1만5000명에 달하는 등 중국만이 할 수 있는 ‘규모’와 ‘웅장함’으로 전 세계를 사로잡았다. 반면 올해 개회식은 5분의1 규모인 3000여 명만 등장했다. 대신 이 간격을 각종 첨단기술로 메웠다. 1만1600㎡의 무대에 초고화질의 LED 스크린이 설치돼 눈과 얼음을 정밀하게 표현했고, 공연에 나선 어린이들이 움직일 때마다 스크린에 움직임이 표시되도록 한 ‘인공지능 라이브 모션 캡처’ 기술도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두 올림픽 모두 개회식의 총연출은 세계적인 영화 거장 장이머우(張藝謀) 감독이었고 무대 역시 국가체육장 ‘냐오차오’였다. 그러나 추구하는 방점은 확실히 달랐다. 첫 베이징 올림픽 개회식이 ‘중국적’인 요소를 강조했다면 이번 개회식은 ‘보편성’을 더 내세웠다는 느낌을 받았다.
2008년 올림픽 개회식에서 장 감독은 중국의 발명품인 종이와 한자, 나침반, 만리장성, 경극(京劇), 실크로드 등을 선보였다. 중국이 인류 문명에 기여한 것들을 하나씩 소개하면서 ‘중국이 이만큼 저력이 있는 나라’라는 사실을 알리는 데 초점을 맞췄다. 그러나 이번 개회식에서는 중국인들이 누구나 즐기는 광장무(廣場舞)를 내세웠고 중국 국기 게양 때 소수민족 복장을 입은 이들이 중국의 국기인 오성홍기도 전달했다. 의도적인 ‘절제’가 두드러진 대목이었다. 아이들을 통해 ‘평화’와 ‘사랑’과 같은 인류 보편의 가치를 표현한 대목에서는 중국이 한층 더 성숙한 단계로 나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막식의 하이라이트인 성화 점화에서도 두 대회는 차이가 있었다. 2008년 개회식에서 최종 주자가 와이어를 달고 경기장 지붕 위를 날아다녀 10만 관중의 탄성을 자아냈다. 그런데 이번에는 별도의 성화대 없이 최종 주자의 성화봉 자체를 성화대로 활용하는 파격을 제시했다.
이런 차이는 어디서 비롯됐을까. 그간 달라진 중국의 위상과 이를 바라보는 중국인들의 태도가 반영된 것으로 생각된다. 2008년만 해도 중국은 자신의 존재감을 세계에 알리고 국민에게 자긍심을 심어주고자 노력했다. 요즘 말로 ‘스웨그(자신의 장점과 가치를 적극적으로 알림)’가 필요했다. 그러나 2022년의 중국은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G2’ 국가다. 굳이 자신을 설명하지 않아도 세계가 중국의 위상을 잘 안다.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개·폐회식 총감독을 맡았던 송승환 연출가는 “중국이 2008년(베이징 하계올림픽)엔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면, 이제는 어깨에 힘을 빼고 한결 여유로워진 것 같다”고 평했다.
도쿄 올림픽 때와 차원 다른 베이징 폐쇄 루프
코로나19 팬데믹 속에서 열린 이번 대회는 폐쇄 루프로 불리는 방역 시스템 안에서 치러졌다. 감염병 확산을 원천 차단하고자 대회 참가자와 일반 중국인을 완전히 분리하는 방식이다. 베이징이란 거대한 도시 안에 올림픽 운영을 위한 또 하나의 도시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대회 참가자는 올림픽 조직위원회가 지정한 호텔과 경기장만 오갈 수 있었다. 외부인이 폐쇄 루프 안으로 들어갔다 나오면 호텔 등에서 3주간 격리를 해야 했다. 6개월 전 열린 도쿄 하계올림픽 때 방역 대책과는 수준이 달랐다. 도쿄 대회에서는 참가자들에게 ‘15분 편의점 외출’ 등 폐쇄 루프 밖으로 나갈 기회가 주어졌지만 베이징은 자신의 방역 원칙을 철저히 지켰다.
나는 폐쇄 루프가 아닌 베이징 시내에서 올림픽을 지켜봤다. 올림픽 조직위원회는 폐쇄 루프 밖에 있는 기자들을 위해 별도의 미디어센터를 마련했다. 입장이 매우 까다로웠다. 48시간 이내에 핵산 검사 음성 판정을 받은 기록이 있어야 건물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일단 들어와도 공항 출국 과정에 준하는 수색을 마쳐야 기자석에 앉을 수 있었다. 나는 주로 3층에 마련된 외신기자 센터에서 일했다. 전 세계에서 온 특파원들이 이곳에 모여 있었다. 북한(조선)에서 온 기자들도 만날 수 있어 무척 반가웠다. 기자들에게 식사가 무료로 제공됐고 커피와 차, 생수, 다과도 공짜였다. 자원봉사자들도 친절하고 열정적으로 응대했다. 이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중국의 놀라운 성장 돋보여…한복 논란은 ‘성장통’
이번 대회에선 중국의 선전이 돋보였다. 4년 전 평창에서 금메달 1개, 은메달 6개, 동메달 2개로 16위에 올랐던 것과 비교하면 놀라운 성적이다. 반대로 한국의 부진이 안타까웠다. 4년 전 한국은 금메달 5개, 은메달 8개, 동메달 4개로 7위를 차지했다. 중국의 괄목한 발전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고 본다. 우선 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중국 정부가 동계 스포츠 분야의 투자를 크게 늘린 것이 주효했다. 여자 스키선수 구아이링(谷爱凌) 등 해외에서 귀화한 선수들의 활약도 한 몫 했다. 여기에 개최국의 이점도 무시할 수 없다. 이는 중국 뿐 아니라 올림픽을 여는 모든 나라가 누리는 공통의 혜택이다. 4년 전 한국도 마찬가지였다. 아무튼 중국은 개최국의 투자와 노력, 홈 어드밴티지 등이 맞물려 국민들에 큰 기쁨을 선사했다.
아쉬운 점이 하나 있다면 개막식 때 불거진 ‘한복 논란’이었다. 식전 행사에서 한복을 차려 입은 중국 조선족 주민들이 방 안에 둘러 앉아 설날을 보내며 윷놀이를 하고, 밖에서는 강강술래와 쥐불놀이, 상모놀이 등을 하는 영상이 방영됐다. 본행사에서도 흰색 저고리와 분홍색 치마를 입고 머리를 땋아 댕기로 장식한 조선족 여성이 무대에 등장해 국기 전달 행사에 참여했다.
한국에서 “중국이 한복을 자신들의 것이라고 주장하려는 것 아니냐”, “한국이 중국의 일부라고 말하고 싶은 것 아니냐”는 의심이 나왔다. 이에 대해 중국에서는 “중국의 대표적 소수민족인 조선족을 소개하려는 것 뿐이다”, “170만명의 조선족의 전통 의상을 전 세계에 알리는 것인데 좋은 일 아니냐” 등 반론이 제기됐다. 나는 두 나라의 반응이 다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주한 중국대사관의 말대로 “(한복 등) 전통문화는 한반도(남·북한)의 것이자 중국 조선족의 것”이다. 한국인들이 같은 민족인 조선족의 입장을 좀 더 헤아렸다면 어땠을까 하는 마음이 든다. 그러나 한국이 왜 이런 식으로 반응했는지에 대해 중국인도 이해가 필요하다. 최근 들어 두 나라 사이에서 “한복(韓服)은 중국의 한푸(漢服)에서 왔다”, “김치는 중국의 파오차이(중국식 절임채소)에서 유래했다” 등 정확한 근거나 출처를 확인할 수 없는 내용이 온라인에서 퍼졌고 이것이 한중 양국에서 기사화된 영향을 받았다.
한복 논란은 한중 두 나라가 더 좋은 친구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겪는 ‘성장통’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양국 모두 상대방이 민감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를 좀 더 이해하고 배려하는 자세를 갖게 될 것으로 본다. 여러 면에서 나에게 베이징 동계올림픽은 영원히 잊지 못할 대회로 기억될 듯 하다.
글|류지영 (서울신문 베이징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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