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10
현대 중국어에서 미식을 좋아하고 미식에 관한 경험이 풍부한 사람을 ‘라오타오(老饕)’, ‘타오커(饕客)’라고 부르며 다양한 음식이 풍성한 만찬을 ‘타오테성옌(饕餮盛宴)’이라고 한다. 이 말들에 담긴 문화적 의미의 기원은 고대 중국의 신수인 타오톄(饕餮), 즉 ‘도철’에서 비롯됐다.
고대 중국의 전설 속 ‘도철’
도철은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좌전(左傳)> 기록에 따르면 혼돈(渾敦)과 궁기(窮奇), 도올(檮杌), 도철 4개 부락이 요(堯)의 뒤를 이어받은 순(舜)에 불복해 사방의 변경으로 쫓겨났고 이로써 천하가 순에 복종했다. 따라서 중국 고대 신화 속 혼돈·궁기·도올·도철을 ‘사흉(四凶)’이라고 한다. <사기(史記)>에도 비슷한 기록이 있다. 그러나 <사기>에서 도철은 염제의 후손인 ‘진운씨(纈雲氏)’의 아들로 기록하고 있으며 식탐이 강하고 재물을 수탈하는 악인으로 묘사했다.
전국시대 말기의 <여씨춘추(呂氏春秋)>에는 주나라의 정(鼎)에 도철의 형상이 새겨져 있는데 머리만 있고 몸통이 없는 이미지다. 너무 탐욕스러워 먹다가 먹다가 결국 자신까지 먹어치우게 돼 ‘악은 악으로 갚아진다는 것(惡有惡報)’을 보여준다. 동진(東晉)의 곽박(郭璞)이 주해한 <산해경>에 따르면 도철은 양의 몸에 인간 얼굴, 호랑이 이빨에 인간의 발톱을 가졌고 겨드랑이 아래에 눈이 있으며 아기 소리를 내고 식인을 즐겼다. 동한(東漢)의 <신이경(神異經)>에는 도철의 몸은 양이 아니라 소라고 기록돼 있다. 어쨌든 상고시대 중국인은 ‘도철’을 탐욕스러운 식인 괴물로 여겼다. 2016년 장이머우(張藝謀) 감독의 영화 <장성(長城, The Great Wall)>에서는 이 전설을 차용해 영화 속 괴물의 이름을 ‘도철’이라고 했다.
흥미로운 점은 중국 양저(良渚)문화의 옥기와 도기, 상나라부터 서주 초기의 청동기에도 동일한 유형의 짐승 문양이 자주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 문양에는 짐승의 얼굴, 몸통, 다리 등이 포함됐다. 상고시대 중국에서 이런 짐승 문양이 장식 기능과 문화적 의미를 지녔던 것으로 미뤄 짐작할 수 있다. 명나라 때 민간에서 용생구자(龍生九子, 용이 아홉 아들을 낳다) 전설이 성행하자 문인들은 도철을 용의 아홉 자식 중 하나로 해석했고 상나라와 주나라의 청동기에 있는 독특한 짐승 문양을 ‘도철 문양’이라고 여겼다. 도철이 먹는 것을 탐하고 좋아했기 때문에 고대 사람들이 정에 새겼다고 본 것이다. 명나라 양신(楊慎)의 <승암집(升菴集)>에는 ‘도철호음식, 고립우정개(饕餮好飲食 故立於鼎蓋, 도철이 음식을 좋아해 솥뚜껑 위에 서 있다)’라고 했다. 따라서 명·청 시대의 자정(瓷鼎), 자로(瓷爐)에는 상·주 시대의 ‘도철 문양’을 모방한 것이 많다.
이후 ‘도철’은 음식을 좋아하고 잘 먹는 미식가로 의미가 점차 진화했다. ‘도철 문양’은 중화 문화의 중요한 형상 중 하나가 됐고 오늘날 통용되는 제5세대 위안화 20위안권에도 ‘도철 무늬’가 인쇄돼 있다.
‘도철’과 조선왕조의 반부패
고대 한국은 기본적으로 ‘도철’의 탐욕스러운 문화적 이미지를 수용했다. 조선 세종 때 군대에서 말을 밀매하는 폐단이 발생하자 의정부(조선시대 최고 행정기관) 찬성 신개(申槪)는 상소문을 올렸다. 사리사욕을 위해 국경을 지키는 병사들의 이익을 해치는 일마저 서슴지 않는 그들이 탐욕스러운 도철과 다를바 없다고 비판했다. 1437년 사간원이 세종에게 올린 상소에 따르면, 사대부의 죄 중 부정부패보다 더한 것은 없기 때문에 엄중하게 벌해야 한다고 간언했다. 사간원은 또 상고시대 순이 즉위하고 제일 먼저 탐욕많은 도철을 제거하고 유배 보내는 것이 성인이 악을 제거하는 길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세종도 순의 방법을 본받아 죄가 사형에 이르지 않은 탐관오리들을 전부 변방으로 유배 시키고 평생 군역하기를 바랐다.
1593년, 막 임진왜란이 발발한 조선에서는 반성을 한다. 사헌부는 선조에게 상소를 올려 최근 조선에 “탐욕의 바람이 크게 일 만큼 나라 상황이 좋지 않다”고 직언했다. 많은 사대부들이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도철’처럼 끝없는 욕심을 드러내고 있다며, 겉으로는 청렴을 가장하고 개인의 미담을 떠벌리지만 실제 뒤에서는 서로 결탁과 청탁을 일삼는 등 국가의 공공재를 사적으로 이용한다고 지적했다.
1861년, 정언 이만기(李晩耆)는 철종에게 상소해 나라의 기강이 무너져 탐관오리의 행태가 국법을 넘어서고 있다며 통렬히 비판했다. 지방 관리와 군인이 오로지 백성의 고혈을 짜내는 데만 혈안이 돼 있다며 ‘조선 팔도를 돌아보니 대부분 도철이다’라고 지적했다. 안타깝게도 철종은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1862년 ‘임술민란’이 발발했다. 한국 영화 <군도: 민란의 시대>도 이를 배경으로 제작했다.
조선의 시문 속 ‘도철’
조선의 문인들도 ‘도철’의 문화적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조선 중기, 정전(鄭佺)은 <만리(輓李)>라는 시에서 친우에게 애도를 표하며 인생이 꿈 같고 세상의 덧없음과 하늘의 불공평함을 탄식했다. ‘도철’ 같은 강도와 탐관오리들은 건강하고 장수하는 반면, 순수하고 강직한 친우가 불행히 세상을 떠났다고 비통해 했다. 17세기 홍여하(洪汝河)는 <방창승행(放蒼蠅行)>이라는 시에서 파리가 사람을 성가시게 구는 장면을 흥미롭게 묘사했다. 파리가 날아다니며 식기 위에 앉아 ‘도철’처럼 음식을 핥아대 홍여하가 전혀 안심하고 식사를 할 수 없다고 한 것이다. 허균(許筠)은 <산구게(山狗偈)>에서 들개의 판타지 자백서를 통해 통치 계층의 부패를 비판했다. 들개는 원래 인간이었는데 ‘도철’처럼 탐욕스럽게 재물을 긁어 모으다가 죽어 지옥에서 벌을 받았고 개로 환생해 참회하고 선행을 다짐했다.
조선 후기의 문인 오원(吳瑗)은 25번째 생일에 자신의 뜻을 담은 시를 지었다. 자신은 심신이 건강하고 패기가 있으니 ‘도철’처럼 재물만 탐하는 속물적인 사람이 아니라 열심히 공부하고 부단히 계발해 큰 사람이 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독립운동가 김창숙(金昌淑)은 <희용(戲用)>이라는 시에서 자신은 정신이 맑고 평온하며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해 담담하다고 말했다. 그는 ‘부귀영화란 잠시 피어났다 이내 지는 꽃’처럼 덧없음을 깨닫고 환상에 집착하는 탐욕스러운 사람은 도철처럼 결국 자기 자신도 삼켜버릴 것이라고 했다. 세상 사람들이 서로 속고 속이는 우스꽝스러운 연기에 김창숙은 그들의 추태를 극장 밖에서 ‘관람’하듯 바라봤다.
이 밖에 조선의 문신 신석우(申锡愚)는 사신으로 청나라에 가면서 직례(直隸) 풍윤(豐潤)현(지금의 허베이·河北 탕산·唐山시 펑룬·豐潤구)에서 상·주 시대의 청동기를 감상하며 ‘도철’과 ‘호유(虎蜼, 호랑이와 원숭이)’ 문양의 정교함에 감탄했다. 청나라 문인과 금석학을 교류하면서 ‘도철’에 긍정적인 의미도 있다는 것을 이해했을 것이다.
요즘 많은 사람들은 어쩌면 ‘도철’이 낯설 수도 있지만 음식 평가, 맛집 탐방 등 현대 문화 현상은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으며 심지어 ‘식탐’은 1인 미디어라는 직업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글|위셴룽(喻顯龍), 상하이(上海)외국어대학 글로벌문명사연구소 전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