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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가을의 대홍포, 운무 가득한 숲속을 걷듯


2024-09-23      

황제가 차나무에게 홍포를 하사해 이름 붙여진 대홍포차

 

무더운 여름도 어느새 지나갔다. 공기의 감촉도 많이 바뀌었다. 밤이면 스산한 한기가 느껴질 때도 있다. 계절은 어떻게 오고 가야 할 때를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일까? 우리 인생도 오고 가야 할 때를 알 수 있다면 좋을텐데. 그것만 잘 해도 삶의 실수를 많이 줄일 수 있을 텐데 말이다.


가을이 되면 어떤 이들은 단풍을 떠올리고 어떤 이들은 따뜻한 우동 한 그릇을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나는 자연스레 대홍포(大紅袍) 한잔이 생각난다. 내게 가을은 낙엽의 계절이 아니라 짙은 암운(巖韻, ‘바위의 기운’으로 불리는 우롱차 특유의 맛과 향)이 그리운 계절이다.


우롱차(烏龍茶) 한 잔을 우리면 방 안 가득 암갈색 향이 깔린다. 눈을 감고 그 내음을 맡고 있노라면 운무가 짙은 숲 속을 걷고 있는 것만 같다. 여기에 재즈라도 한 곡 틀어 두면 가을을 맞을 준비가 끝난다. 을을 맞을 준비가 끝난다.


차를 마시고 난 뒤로 내게 가을은 우롱차와 함께 시작하는 계절이 됐다. 반(半)발효차인 대홍포는 여름과 겨울 사이, 그러니까 백차(白茶)와 보이차(普洱茶) 사이에 잠입한 가을의 쌀쌀함을 채워주기 제격이다.

대홍포는 ‘우롱차의 왕’으로 불린다. 중국에서 난다 긴다 하는 것마다 ‘왕’자가 붙어서 식상할 수도 있지만 대홍포의 기원을 들으면 고개를 끄덕일만 하다.


대홍포가 민간에 처음 알려진 것은 1385년 명(明) 초대 황제인 홍무제(洪武帝)때다. 구체적인 연도가 거론되는 것으로 보아 제법 그럴싸한 설이 아닌가 싶다. 과거를 보기 위해 베이징(北京)으로 향하던 한 유생이 푸젠(福建)성 우이산(武夷山)을 지나고 있었다. 고된 과거 길에 탈이 났는지 병으로 앓아 누웠다. 마침 인근 사찰인 천심영락사(天心永樂寺)의 한 스님을 만났고, 그가 가지고 있던 찻잎을 우려 먹이자 병이 나았다. 뻔한 스토리지만 이 유생은 장원급제했고 고마움의 뜻으로 황제가 하사한 홍포(紅袍, 임금이 신하들로부터 하례·賀禮를 받을 때 입던 예복·禮服)를 우이산의 차나무에 걸쳐 줬다.


대홍포는 푸젠성 우이산 일대에서 생산되는 무이암차 하나다.


이야기가 여기서 끝나면 시시하다. 급제 후 조정에 들어간 그는 혁혁한 공을 세우게 된다. 황후가 큰 병에 걸렸는데 황실의 모든 어의가 나서 치료를 해보지만 백약이 무효였다. 장원은 우이산에서 마셨던 차를 떠올리고는 사람을 보내 찻잎을 가져오도록 했다. 황후는 우이산 구룡굴 인근에서 자란 차나무의 찻잎으로 만든 차를 마시고 병이 나았고, 황제는 이 차나무에 황제의 상징인 홍포를 내렸다.


이후부터 이 나무에서 나는 잎으로 만든 차는 매년 조정에 공차로 바쳐졌고 그 명성이 온 천하에 자자해졌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우이산 절벽에서 자란 차나무 잎으로 만든 차를 ‘대홍포’라 불렀다. 뭔가 논픽션과 픽션이 적절히 섞인 것 같은 기원설이다. 이 이야기가 마케팅 상술이든 역사적 근거가 있는 사실이든, 중요한 것은 대홍포가 맛있다는 것이다.


명대에 명성을 얻었지만, 사실 우이산 인근 차나무는 당나라 때부터 차로 만들어졌고 이미 송대에 그 이름이 널리 알려져 황실에 공차로 바쳐졌다. 새로운 왕조가 들어설 때마다 공차로 진상됐을 만큼 우이산의 차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고 있었다.


전설로만 전해 내려오는 우이산의 대홍포 나무를 찾기 위해 중국 정부는 지리 조사를 펼치기도 했다. 각종 조사를 거쳐 중국 정부는 우이산 구룡굴 근처에서 네 그루의 대홍포 나무를 찾아냈다. 이 나무들은 수령이 천 년인 것들로, 나무가 자라고 있는 주위 환경을 보면 왜 그렇게 대홍포가 값이 나가고 유명한지 알 수 있다. 원조 대홍포 차나무가 자라는 절벽은 일조량이 짧고 일교차가 크며 바위 꼭대기에는 일 년 내내 마르지 않는 샘이 흐른다. 언뜻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면 무협지나 영화 〈아바타〉에 나오는 기암절벽을 떠올리면 된다. 이 특수한 자연환경은 차맛에 암운을 입히고 깊은 맛을 낸다.


최상급의 대홍포는 아홉 번을 우려도 차가 나올 정도로 내포성이 좋으며, 맛과 향도 다른 차와 비할 수 없이 깊다. 2006년부터 중국 정부는 대홍포의 모목(母木)에서는 찻잎을 채엽하지 못하게 했고 마지막에 채취한 찻잎으로 만든 대홍포는 고궁박물관에 보관했다. 현재는 모목 인근 여섯 그루의 나무에서 찻잎을 따 최상급 대홍포를 만든다. 이마저도 국가에서 직접 관리해서 개인이 맛을 보기는 어렵다.


여섯 그루의 나무에서 한 해 동안 나는 찻잎은 1kg 남짓이다. 이 찻잎은 매년 경매를 통해 일부가 판매되는 데 20g에 한화 3 천만 원을 호가한다고 하니 구하기도 어려울뿐더러 설령 구했다 하더라도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길도 없다. 아마도 이번 생에는 마시기가 어려워 보인다. “어? 나는 중국 친구가 준 대홍포를 마신 적이 있는데.” 하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마신 대홍포와 여기서 설명한 대홍포는 엄연히 다른 것이니 크게 신경쓰지는 말자.


무이암차(武夷巖茶)인 대홍포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푸젠성 우이산 일대에서 생산된다. 우이산의 평균 고도는 600m, 연강수량은 2000mm, 평균 기온은 18.5도다. 이 산은 사방 60km에 걸쳐 펼쳐져 있고, 36개의 봉우리와 99개의 바위로 이뤄져 있다. 딱 무협지 주인공인 무림 고수가 은둔하고 있는 산의 모양과 같다. 이렇게 규모가 웅장하니 중국 정부에서 대대적인 조사를 벌였음에도 대홍포의 모목을 찾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대홍포는 4월 말과 5월 초에 따는 봄차를 최상급으로 치며 채엽 지역에 따라 품질이 세 등급으로 분류된다.

 

우이산의 토양 역시 차 맛을 내는 중요한 근간이다. 우이산은 바위로 이뤄진 산이어서 토양 역시 바위가 풍화돼 산성을 띤다. 차에서 씁쓸하면서도 짙은 암운같은 향이 나는 이유는 이 토양의 공이 크다.


대홍포는 4월 말과 5월 초에 따는 봄차를 최상급으로 치며, 따는 지역에 따라 세 등급으로 품질이 나뉜다. 최상급은 우이산 관광구 안에서 채엽한 차이고, 두 번째 등급은 우이산 관광구 외곽에서 채취한 것이다. 세 번째 등급은 우이산 관광구 근처 마을에서 재배한 차다. 마지막 등급의 차는 우리가 전설로 듣던 그 우이암차라고 보기는 어렵고 대규모 차밭에서 재배되기 때문에 암운을 느끼기에는 다소 부족함이 있다. 그러니 중국 어느 벽지 호텔에서 묵을 때 무료로 제공되는 대홍포를 보게 된다면 너무 흥분하지 말고 ‘그냥 맛이나 보자’ 하는 마음으로 가볍게 차를 즐기기 바란다. ‘무료’라는 팻말이 떡하니 버티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고서 말이다.


여태껏 맛본 무이암차 중 가장 맛이 좋았던 것은 중국 국가 무형문화재인 고금 연주가 왕펑(王鵬) 선생의 연주공간인 쥔톈팡(鈞天坊)을 방문했을 때 마신 차다. 베이징 도심에서 남쪽으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쥔톈팡에 찾아갔을 때 덥수룩한 수염에 도인 복장을 한 왕펑 선생은 개인 작업실에 있는 다실로 우리 일행을 이끌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때 개막 공연 무대에 섰던 왕펑 선생이 마시는 차는 무엇일까 궁금해서 물었더니 그는 무이암차만 마신다고 했다. 그때 나는 한참 보이차에 빠져 있던 때라 조금 의아했다. 그러나 우이산에서 직접 공수해 온다는 왕펑 선생의 대홍포는 지금까지 내가 마셨던 차와는 급자체가 달랐다. 앉은 자리에서 10번 이상 차를 우려냈지만 기운이 그대로였다. 포장도 캔에 밀봉된 형태로 돼 있었는데, 이것이 향을 오래 잡아 둘 수 있는 비결이라고 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2등급 정도 되는 대홍포가 아니었을까 싶다.


무이암차 중에는 대홍포 외에도 좋은 차가 많다. 보통 우이사대명총(武夷四大名樅)이라고 해서 대홍포, 백계관(白鷄冠), 철라한(鐵羅漢), 수금귀(水金龜) 등을 최고로 꼽는다. 개인적으로는 대홍포 외에 계피향이 은은하게 퍼지는 육계(肉桂)와 맑은 기운이 강한 수선화(水仙花)를 좋아한다.


계피향을 맡으면 가을을 한껏 마시는 기분이 들어서일까. 우롱차 자체가 향을 즐기는 차이기도 하지만, 무이암차는 향이 그윽해 가을 분위기에 더욱 잘 어울린다.


9월의 늦더위가 슬슬 지나고 10월의 완연한 가을 기운이 느껴질 때, 짙은 암운이 감도는 대홍포를 우려 마시며 고요하게 가을을 맞이해 보자. 좋은 오디오가 없어도 상관없다. 휴대폰에 블루투스 스피커라도 연결해 재즈를 틀어두자. 가을의 젖은 낙엽같은 대홍포 향 사이로 재즈가 스미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면 이미 가을은 성큼 다가와 있는 것이다. 


글 | 김진방(한국) 사진 | 인공지능(AI) 생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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