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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천년 중한 문화교류의 역사와 현재


2019-07-15      

2012년 9월 28일, 성균관대에서 열린 공자를 비롯한 유교 성현들을 모시는 제례행사에서 한국 학생들이 춤을 추고 있다. 사진/VCG

중한 양국은 지리적으로 가깝고 문화가 통하며 서로에게 좋은 이웃이자 파트너다. 정치 안보, 경제 협력, 인문 교류 등 다양한 분야에서 광범위하고 심도 있는 교류와 협력을 진행했다. 양국은 옛부터 문화 교류가 빈번하고 활발해 문화 교류 역사가 길다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수천 년 역사 문화 교류는 현재 중한 양국의 교류에 매우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고 양국 관계 발전을 더욱 추진했다.

신라시대 왕자 출신인 김교각은 6세기 중국으로 건너가 구화산에서 수행했다. 입적 후에도 시신이 썩지 않았으며 지금까지도 중국인들에게 지장보살의 화신으로 여겨진다. 이로 인해 구화산 역시 중국 4대 불교 명산 중 하나가 되었다. 사진은 안후이 주화산(구화산)  사진/VCG

양국 역사에 스며든 유가사상
양국 문화 교류 역사는 풍부하고 다채롭다고 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쉽게 떠오르는 것이 유가사상이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1세기 초부터 조선반도(한반도)인들은 <시경(詩經)>과 <상서(尚書)>, <춘추(春秋)> 등 유가 서적을 암송했고, 공자 사상이 전파되기 시작했다. 서기 374년 백제에 중국 유가 경전에 통달한 ‘박사’ 직위가 설치됐다. 백제 박사 왕인은 유가 5경을 갖고 일본으로 건너가 전파했다. 이후 통일신라 시기와 고려 전기를 거쳐 유가 경전은 조선반도의 공식 교육 교재가 됐다. 1134년 고려 국왕 인종은 <효경(孝經)>, <논어(論語)> 등 유가 경전을 민간 학동에게 하사해 유가사상을 더 널리 보급했다. 고려 학자 최충은 유가 경전을 포함한 중국 서적을 교재로 삼아 학문을 전파했고, 사립학교를 세워 인재를 많이 배출해 ‘해동공자(海東孔子)’라고 불렸다.

성리학이 유입되고 발전하면서 조선 시기 유가사상은 국가 이데올로기로 자리잡았고, 유교가 국교가 되어 대한제국까지 이어졌다. 이 기간 동안 성리학은 한국에서 발전을 거듭해 이이, 이황 같은 유교 사상가가 탄생했다.

현재 유가 경전의 수많은 단어, 용어, 사상 등이 현대 한국인에게 깊이 뿌리내렸다. 실제로 요즘도 한국인은 효도사상을 한국 문화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현재 서울 성균관 대성전에는 공자와 제자 15명의 위패 및 주자를 필두로 한 성리학 대가 6명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또 한국 성리학 선현 18명도 모셔져 있다. 매년 봄, 가을 두 번 제사를 지낸다. 이밖에 한국의 <유교조판인쇄목각판(儒教雕版印刷木刻板)>이 2014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됐다. 한국에는 공자, 유가문화 같은 깊은 뿌리와 연결고리가 있어 2004년 중국은 전세계 첫 번째 공자학원을 한국 서울에 설립했다.

조선반도에서 탄생한 예술은 고대 중국인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중국의 남북조 시기 궁정에서는 ‘백제악’ 연주가 널리 유행했다. 사진은 2010년 9월 14일 충청남도 도청이 관련 기관과 함께 복원한 백제 시대 악기의 모습  사진/VCG

종교·문화·교육으로 연결된 두 나라 
유가사상 외에 양국은 불교 문화 교류도 매우 활발했다. 불교는 북인도에서 중국을 거쳐 4세기 말 조선반도에 전해진 이후 점차 발전했다. 통일신라와 고려 시기에는 불교를 숭상해 중국에서 불법을 구하고 본국으로 돌아가 불법을 전파하는 승려가 많았다. 대표적인 인물로 ‘신인종(神印宗)’의 창시자 명랑(明朗), 신라 ‘율종(律宗)’의 창시자 자장(慈藏), ‘해동화엄조사(海東華嚴祖師)’라고 불리는 의상(義湘), ‘해동법장(海東法將)’ 원측(圓測) 등이 있다.

뿐만 아니라 조선반도에서 온 많은 승려가 중국의 실크로드를 거쳐 인도로 불법을 구하러 떠났다. 예를 들어 신라 승려 혜초(慧超)는 해로로 인도에 갔다가 불법을 구한 다음 육로로 인도에서 페르시아, 타지크, 돌궐, 서역, 둔황을 거쳐 장안(長安)에 도착했고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썼다. 혜업(慧業), 현태(玄太), 현각(玄恪) 등 신라 승려도 실크로드에 족적을 남겼다. 둔황 막고굴에 있는 벽화에 조선반도 왕실과 민간 인사들이 중국으로 불법을 구하러 온 이미지가 반영돼 있다. 제61굴의 <오대산도(五台山圖)>에는 신라왕탑이 묘사됐을 뿐 아니라 신라송공사(新羅送供使)와 고려 왕사가 오대산에서 불공드리는 장면이 있다.

신라 왕자 김교각은 6세기 중반 중국 구화산에서 수행하다가 입적 후에도 육신이 썪지 않아 중국인은 그를 지장왕보살의 화신으로 생각했다. 이 때문에 구화산은 중국 불교 4대 명산 중 하나가 됐다. 신라의 승려 무상(無相)이 창립한 다도인 ‘무상선다(無相禅茶)’는 중한 양국에서 계승, 발전됐다.

양국은 문화와 교육 교류도 매우 활발했다. 당나라 초기, 신라는 당나라에 유학생을 공식 파견했다. 많을 때는 한 번에 100여 명에 달하기도 했다. 신라 유학생은 당나라에서 공부는 물론 관직에도 나갈 수 있었다. 고려 시대에도 많은 청년 학자가 송나라에서 공부했다. 1099년 송 철종은 고려 학자가 중국 과거시험에 참여해 진사 관직에 오를 수 있도록 조서를 내렸다. 반대로 송나라의 진사 장정(張廷), 노인(盧寅), 진위(陳渭), 신수(慎修) 등은 고려에서 관직에 나갔고 요직에도 올랐다. 특히 주목할 사람은 중국 오대 시기 후주(後周) 사람 쌍기(雙冀)다. 그는 고려 국왕 광종의 눈에 들어 고려에서 관직에 올랐다. 쌍기의 제안으로 고려도 과거제도를 시작했다.

당나라 때 외국인 유학생 중 신라 학생이 제일 많았다. 지금도 중국에 있는 외국인 유학생 가운데 한국인이 제일 많다. 중국 교육부 통계에 따르면 2018년 재중 한국인 유학생 수는 5만600명에 달했다. 한국 역시 마찬가지다. 2017년 4월 말 기준 재한 중국인 유학생 수는 6만8194명(홍콩·마카오·타이완 제외)에 달해 재한 외국인 유학생 수의 55.1%를 차지했다.

이 밖에 고대 중국 서적이 조선반도로 대량 유입됐다. 도연명(陶淵明), 두보(杜甫), 소동파(蘇東坡) 등 문학의 거장이 고대 한국인에게 사랑받았다. 신라인 최치원의 시문과 대표작 <계원필경(桂苑筆耕)>은 북송의 대가 구양수(歐陽修)가 편찬한 <신당서예문지(新唐書藝文志)>에 수록됐고 청나라 때에는 사고전서(四庫全書)에 수록돼 중국인의 추앙을 받았다.

중국의 서예는 조선반도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2018년 5월 8일, 한국서예퍼포먼스협회 소속 서예가들이 어버이날을 맞아 대구에서 열린 서예공연에서 ‘효(孝)’를 주제로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사진/VCG

일맥상통한 ‘한풍’과 ‘한류’
예술 교류 분야를 살펴보면 중국의 음악, 회화, 서예, 조각 등 기예와 스타일이 조선반도에 큰 영향을 미쳤고 조선반도는 이를 기반으로 혁신을 이뤘다. ‘한풍(漢風)’이라 할 수 있다. 664년 신라 문무왕 때 김법민은 악사 성천(星川), 구일(丘日) 등 28명을 당나라로 보내 당악(唐樂)을 배우도록 했고 그들은 중국 악기 12종을 갖고 돌아와 신라 음악을 크게 발전시켰다. 북송 휘종(徽宗)은 고려 왕조에 중국 아악 악기와 악보를 두 차례 보냈고 악공을 직접 파견해 기예를 전수시켜 고려는 중국 북송 대성악(大晟樂)을 흡수한 유일한 나라가 됐다. 이후 궁중음악이 당악과 향악 두 부분으로 나뉘게 됐다. 이런 제도는 조선왕조가 계승했다.

신라는 당나라의 영향을 받아 서예가 성행했다. 신라의 서예가 김생(金生)은 수준이 매우 높고 서체가 왕희지와 매우 비슷해 이후 송나라 한림대조 양구(楊球)와 이혁(李革)이 그의 작품을 보고 왕희지의 진필인 줄 알 정도였다. 중국 원나라 때의 유명 서예가 조맹부(趙孟頫)도 김생의 글씨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조선시대 <효녀 심청전> 이야기는 중국이 배경이고, <춘향전>과 <흥부전>은 중국의 서적과 시사를 많이 참조했지만 조선반도 문화 특징을 완벽하게 보여주었다.반대로 조선반도의 예술도 고대 중국인에게 사랑받았다. <구당서(舊唐書)>기록에 따르면 남조(南朝) 류송(劉宋) 궁중에는 백제악 연주가 있었고, 북주(北周)는 이를 ‘국기(國伎)’ 중 하나로 편입시켰다. 수·당(隋唐) 양대에 이르러 조선반도에서 건너온 음악은 궁중에서 늘 준비하는 곡목이 됐고 이런 형식은 청나라 말까지 계속됐다.

예로부터 조선반도는 중국 저장성 연해 지역과 해상무역이 빈번했으며, 지금도 이러한 역사를 증명하는 수많은 유물이 남아 있다. 사진은 2019년 1월 31일 저장성 닝보 위야오시박물관에서 고려의 비취색 청유자정병(靑釉瓷淨甁)을 감상하는 시민들의 모습  사진/VCG

현재 한국 영화, 드라마, 패션, 화장품, 아이돌 그룹 등을 좋아하는 중국인이 많다. 그러나 이는 요즘의 특수한 현상이 아니라 고대 중국에도 ‘한류(韓流)’가 있었다.원나라 때에는 고려 문화가 성행했다. 원나라 장원필(張元弼)은 <연하곡(辇下曲)>에서 ‘궁의신상고려양(宮衣新尚高麗樣)’이라고 했다. 이는 궁궐에서 입는 화복(華服)에 고려 스타일이 유행했다는 뜻이다. 청나라 필원(畢沅)은 <속자치통감(續資治通鑒)>에서 원나라의 많은 관료와 지방 유지가 ‘옷, 신발과 모자, 기물 등을 고려 스타일로 했다’고 썼다. 원나라 시인 장욱(張昱)은 <정즉리(井即梨)>에서 ‘위병학득고려어, 연비저가정즉리(衛兵學得高麗語, 連臂低歌井即梨)’라고 했다. 여기서 정즉리는 고려의 ‘정읍사(井邑詞)’로 고려 전통 가요다. 현대인의 말로 하면 원나라 궁궐 위병이 고려 말을 배워 고대 버전인 K-POP을 조용히 불렀다는 뜻이다. 원나라 때 고관과 귀인은 명절 연회에서 고려 가기(歌伎)를 초대해 고려 가무를 공연하도록 했다. 원나라 때 씌여진 시에 ‘천하승평근백년, 가기무녀출조선(天下承平近百年, 歌伎舞女出朝鮮)’이라는 구절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고대 중국에서 ‘한류’가 유행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명·청(明清) 시기에 이르러 조선의 두건, 고려인삼, 한지 등이 중국 민중의 사랑을 받았다. 명나라 성조(成祖)는 조선 김치와 새우젓을 매우 좋아했다. 고려청자도 중국인의 사랑을 받았다. 고려청자는 송나라의 월주(越州) 자기 기술과 스타일을 흡수했지만 자신만의 특징을 창조해냈다.

문명은 다양해서 교류하고 서로 배우며 발전한다. 중한 양국 문화는 천 년의 교류, 배움, 융합, 발전을 거쳐 이렇게 생기를 띠게 된 것이다. 2014년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한국 서울대학교를 방문해 양국 문화 교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시 주석은 ‘국가 관계 발전은 인민의 마음이 통하고 뜻이 맞아야 한다’며 ‘마음으로 교류해야 멀리 간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당시 중한 양국은 문화 교류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양국 전통문화 교류 사업을 공식 문건에 넣었다. 2017년 문재인 대통령은 중국 베이징대학교 연설에서 양국 문화 교류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양국 교류의 찬란한 역사와 번영 현황을 언급했다. 문 대통령은 한국인은 날마다 중국 문화를 접하고 중국의 칭다오(靑島)맥주, 양러우촨(羊肉串), 쓰촨마라탕(四川麻辣燙) 등을 즐기며, 그 자신도 <삼국지>를 즐겨 읽는다고 말했다.

중한 양국이 개방 정신으로 문화 교류를 강화하고, 민심을 통하게 하며, 우호적이고 솔직한 문명 대화를 이어간다면 양국 인민은 서로의 감정을 이해하고 문화 공감대가 깊어질 것이다. 중한 문화를 포함한 아시아 문명, 더 나아가 인류 문명이 풍성한 수확을 거둘 것이다.


글|위셴룽(喻顯龍), 베이징(北京)대학교 국제관계대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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