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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100년, 중한우의 100년


2019-06-26      글|장진원(張勁文)

저장(浙江)성 항저우(杭州)시 창성로(長生路) 55 호에 위치해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항저우 구지 기념관 내부 모습   사진 / 판정(潘徵)

1919년 4월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이어 4월 11일, 임시정부는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공포했다. 이 사건은 한국과 중국을 비롯해 동북아시아의 역사 전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 과정에서 민족 해방을 향한 애절한 투쟁의 역사가 펼쳐졌다. 오늘날에도 한국 문재인 현 정부는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수립된 1919년을 대한민국의 개국 원년으로 보고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일제로부터의 독립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혁명에 몸바친 중한 독립투사들의 우의가 배어있는 곳이자, 신시대 양국 우호교류의 매개체로서 깊은 의의를 지니고 있다. 그 만큼 양국 국민들이 반드시 함께 지키고 계승해 나가야 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재상하이(在上海) 직원 기념사진(1919.10.11)  사진/ 한국독립기념관 제공
 
한국 정부의 뿌리이자 법통이 시작된 곳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한국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2003년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상하이 임시정부 유적지를 방문해 “이곳은 한국 정부의 뿌리이자 한국 정부의 법통이 시작된 곳이다. 이렇게 잘 지켜준 중국 정부에 감사드린다”고 언급한 바 있다.

또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3·1운동의 직접적인 산물이기도 하다. 당시 임시정부 수립은 일본 침략자들에 굴하지 않는 한국 국민들의 공개적인 일제 단절 선언이자 저항의 상징이었다. 송재익 한양대 융합국방학과 교수는 “대한제국의 국민들은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며 신해혁명과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선언에 자극받아 3.1독립만세운동을 전개했지만, 비폭력 저항운동의 한계를 절감하고 상하이에 조직적이고 통일된 지도단체로서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독립전쟁을 전개했다”고 말했다.

1919년 3~4월, 3·1운동의 여파에 힘입어 한국과 중국 상하이, 러시아 극동 등지에 총 6곳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됐다. 4월 11일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지에 수립된 임시정부도 그 중 하나였다. 같은 해 9월, 상하이에서 통합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정식으로 수립된 뒤 ‘조선은 독립국이다’, ‘조선인은 자주민이다’, ‘조선의 모든 권력은 조선인에게 있다’, ‘조선의 모든 영토는 대한제국 고유의 영토다’ 등의 선언을 통해 대한민국은 자국 영토에 행해지는 일본의 통치권을 모두 부정했다. 이때부터 독립운동가들은 지방교통국을 조직하여 국내 독립운동가들과 반일 투쟁을 위한 접선 활동을 강화했고, 파리와 워싱턴에 대표를 파견해 ‘구미주차한국위원회(歐美駐箚韓國委員會·구미위원부)’를 설립하는 등 대미외교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또 중국 동북지역에 대표를 파견해 반일무장투쟁을 조직·지휘하는 등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중국에서 전개되는 독립운동의 지휘본부 내지 전초기지로 삼았다.

특히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봉건사회와 전제정치를 벗어나 새로운 사회를 수립하고자 했던 국민들의 기대가 반영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더욱 놀랍다.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에서 통과된 최초의 임시 헌장은 비록 10개조에 불과했지만 제1조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는 내용이 뚜렷이 명시되어 있었다.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은 이후 1919년 9월, 1925년 3월, 1927년 4월, 1940년 10월, 1944년 4월 총 다섯 차례에 걸친 개헌을 통해 새로운 임시헌장(임시헌법)을 통과시켰으나 그럼에도 민주정치제를 유지하고자 하는 취지에는 변함이 없었다. 헌장(헌법)에는 한국의 독립 이후 설정할 국가의 성격, 사회제도, 국민의 권리와 의무, 임시의정원, 심판원(審判院), 임시정부의 구성 절차, 임기 및 직무,국가 법률 제정의 기본 원칙과 절차 등이 세밀하게 명문화되어 있었고 법리를 더욱 정교화하여 향후 민주공화국으로서의 기틀을 닦는 데 하나의 청사진을 제시했다.

또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정당제를 시도하기도 했다. 초기 치열했던 당파 투쟁을 거쳐 1940년 5월 8일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등 3당이 충칭(重慶) 치장(綦江)현의 잉산빈관(瀛山賓館)에서 ‘3당 통합회의’를 거행하고 한국독립당으로 거듭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집권당으로 자리잡았다. 1941년 11월 28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공포한 <대한민국 건국강령>에는 독립운동가들이 광복을 앞두고 정리한 건국원칙과 정강정책이 담겼다.

이 같은 내용을 보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한국 역사에 얼마나 중요한 영향을 미쳤는지 알 수 있다. 푸단(復旦)대 조선(북한)·한국 연구센터 스위안화(石源華) 교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한국 독립운동의 현신이자 기치이며 상징이다. 임시정부에는 봉건사회와 전제정치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회를 세우고자 했던 한국인들의 기대와 선택, 시도가 녹아들어 있다”고 평가했다.

상하이시 황푸구 마당로 306농 4 호에 위치한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지는 1993 년 개방 이후 수많은 관광객을 맞이했다 . 사진 / 완취안 (萬全)

혁명을 위해 함께 싸우면서 쌓은 우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한국 정부의 법통을 계승하는 중요한 위치에 있다. 동시에 중한 관계의 측면에서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했던 중국의 주요 대상이자 우정의 상징이기도 했다.

중국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초기부터 다양한 형태의 원조와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임시정부를 구성하던 신규식, 박찬익, 박은식, 김규식, 신채호, 조소앙 등 주요 인물들은 쑨중산(孫中山), 천두슈(陳獨秀), 마오쩌둥(毛澤東) 등 중국 혁명가들로부터 지지를 받으며 중국 문화계 진보인사들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임시정부가 수립될 무렵과 거의 비슷한 시기 양국 인사들에 의해 설립된 ‘신아동제사(新亞同濟社, 초기 명칭은 동제사)’는 상당한 영향력을 지닌 정치단체이자 임정의 든든한 후원군 역할을 했다. 이어 양국의 혁명지사들은 창사(長沙), 안칭(安慶), 한커우(漢口), 지린(吉林), 상하이 등지에 잇따라 ‘중한호조사(中韓互助社)’와 ‘상하이중한호조총사(上海中韓互助總社)’라는 독립운동단체를 설립하고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중국 내 주요 사회단체로서 기능하게 했다.

중국이 최초로 정부 차원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직접적으로 관계를 맺게 된 것은 쑨중산이 수립한 ‘호법군정부(護法軍政府)’를 통해서였다. 1921년 말 광저우(廣州)에서 쑨중산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특사·국무총리 대리·법무총장·외무총장을 겸임한 신규식 간에 이뤄진 만남이 대표적이다. 당시 호법군정부는 대한민국 임정의 법통을 인정하면서 북벌(北伐)임무를 완수하면 임시정부를 전폭적으로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두 정부 간의 약정이었음에도 당시 여러 가지 대내외적인 요소와 각종 제약으로 인해 실제 외교상의 효과는 발생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쑨중산이 보여준 한국 독립운동 지원에 대한 의지는 지금도 소중하게 기억되고 있다.

1920년대 들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힘겨운 투쟁에 돌입하자 핵심 지도층이었던 이동녕, 김구 등은 국면 타개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32년 1월, 김구의 지시를 받은 이봉창 의사가 일본 미야기 사쿠라다 문 앞에서 히로히토 일왕을 향해 수류탄을 던졌지만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1932년 4월, 다시 김구의 지령을 받은 윤봉길 의사가 상하이 훙커우(虹口)공원에서 투척한 도시락 폭탄에 의해 주(駐)상하이 일본군 총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 육군대장, 시게미쓰 마모루 주중공사 등이 죽거나 부상하여 사회적으로 커다란 반응을 일으켰다. 이를 계기로 연일 이어지는 무고한 한국 교민들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김구는 5월 10일 신문에 ‘훙커우공원 폭탄사건의 진상’이라는 제목의 성명을 통해 훙커우 사건의 전말을 밝히고 모든 사건의 책임을 지겠다고 발표했다. 이때부터 일제 침략자들은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지에서 활동하는 독립군들의 거점을 궤멸시키기 위해 한국 독립지사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들이는 등 상하이에서 철저한 복수전을 벌였다.

그러자 중국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본격적인 대규모 원조에 나섰다. 훙커우 사건 이후 임시정부 구성원들은 중국 국민정부와 인민들의 도움으로 저장(浙江)성 항저우(杭州), 자싱(嘉興), 장쑤(江蘇)성 전장(鎮江), 후난(湖南)성 창사(長沙), 광둥(廣東)성 광저우(廣州), 광시(廣西)성 류저우(柳州), 충칭시 치장,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시 충칭에 이르기까지 총 8차례에 걸친 이주를 거쳤다. 이 사이 1933년 1월 국민당의 장제스(蔣介石)는 난징(南京)에서 김구와 비밀리에 접선하여 협력안을 논의한다. 이후 국민당 중앙조직부가 김구 등 독립군들의 생활비로 매달 5000위안을 송금한다. 이때부터 중국 정부는 한국 독립운동단체와 손을 잡기 시작했다.

1937년 7월 일본의 대중 침략전쟁이 본격화되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이끄는 항일 광복투쟁은 또 다시 중국 인민들이 펼치는 항일전쟁의 역사적 급류를 타고 새로운 전진 국면을 맞게 되었다. 1940년 9월 17일 충칭의 가릉빈관(嘉陵賓館)에서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출범식을 마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마침내 ‘한국광복군’이라는 독자적인 무장부대를 보유하게 되었고, 1942년에는 중국 정부의 중개로 조선의용군이 한국광복군에 편입됐다. 그 뒤 한국광복군은 중국 각지에서 조국의 광복을 위해 싸우고 중국의 항일투쟁을 지원하는 등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항일전쟁이 끝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미국의 의지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해체를 선언하게 된다. 이에 중국정부 당국도 한 발 물러서 미국이 정책적으로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중국 내 임정 관련자들을 조속히 한국으로 송환하기로 한다. 임정은 해체됐지만 중국 정부는 여전히 임시정부 주중대표단을 합법적인 교섭상대로 인정하고 이를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적인 수립 이전, 중국 정부가 한국 혁명 지도자들과 연락할 수 있는 대상으로 규정했다. 이에 따라 중국에서 이들의 활동에 각종 편의가 제공됐고 재중 한국교민에 관련한 각종 사무도 논의되기 시작했다. 사실상 정부 주체가 해체된 나라의 주중 정부대표단 활동은 중국 외교사적 측면에서도 매우 특수한 현상이었지만, 당시 중한 양국의 밀접한 관계를 잘 생각해 보면 중국 정부의 행동에도 수긍이 가는 면이 있다.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현재모습)   사진/ 한국독립기념관 제공
 
중한 우호교류의 새로운 역사
일본의 항복선언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공식 해산되었다. 그 후로 오랫동안 역사의 기억 속에 덮인 채로 있던 임시정부는 중한 수교가 이뤄질 무렵 양국 관련자들의 왕래가 빈번해지며 다시 한번 양국 정부와 민간의 주목을 받게 된다. 현재 중국 각지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지는 중국 정부의 보호와 한국 각계각층의 도움으로 새로이 단장되고 외부에 개방됐다. 이를 통해 과거 혁명동지들 간 우정과 신 시대 양 국민 간 우호교류의 역사를 다시금 써 내려가고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처음 시작된 상하이는 중한 수교가 이뤄질 당시 임시정부 유적지 역사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그 후 중국 정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지 주소를 ‘마당로(馬當路) 306농(弄) 4호(號)’로 확정하고 해당 지역의 가옥을 사들여 1993년 3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지 관리처’로 공식 개명했다. 그리고 같은 해 4월 13일, 임시정부 유적지는 보수를 거쳐 대외에 개방됐다.

임시정부 유적지는 상하이와 한국 정부기관 간 공식적인 교류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1993년 중한 수교가 이뤄진 이듬해 상하이시는 부산광역시와 자매도시를 맺었다. 이어 1996년 3월 상하이시 황푸(黃埔)구와 부산시 영도구가 자매구를 맺은 뒤 시작된 공무원 교류연수 프로그램에서 임시정부 유적지는 방중연수 필수 코스가 되었다. 상하이와 한국의 왕래가 빈번해지면서 상하이는 양국의 우호협력을 촉진하는 핵심 도시로 자리잡게 되었다. 통계에 따르면, 2018년 한국과 상하이 간의 무역 규모는 267억 달러로 양국 전체 무역액의 8.5%를 차지하며, 상하이에서 유치한 한국 기업 수는 2700여 곳에 달한다.

상하이 외에도 중국 각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는 양국의 다양한 우호교류의 사연이 녹아있다. 김구는 상하이를 벗어나 저장성 자싱으로 망명했던 기간 중국의 민주애국지사 추푸청(褚輔成) 선생의 도움을 받아 하이옌(海鹽)현에 있는 재청별장(載靑別莊)으로 피신했다. 1995년 10월 하이혠현 지방정부는 김구의 피난처였던 재청별장의 재건 사업을 통해 옛터에 당시의 모습을 복원했다.

1996년 6월, 과거 역사를 기리기 위해 재청별장을 방문한 김구 선생의 아들 김신 장군은 방문록에 남긴 ‘음수사원, 한중우의(飲水思源, 韓中友誼)’이라는 문구를 통해 양 국민들의 우정과 진심이 대를 이어 계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했다. 그해 한국 정부는 김구 선생 등 한국 독립운동가들을 원조한 추부청 선생의 공훈을 인정해 그에게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수여하기로 하고 9월 30일 자싱에서 수여식을 거행했다. 1999년 6월 18일에는 자싱시와 강릉시가 자매도시를 맺었고, 그 뒤 자싱을 찾는 방문객이 점점 많아지면서 재청별장은 자싱의 주요 관광지로 거듭났다.

한편,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충칭에 6년 간 머무른 바 있다. 1995년 8월 11일 충칭 임시정부의 마지막 청사였던 ‘롄화츠 38호(蓮花池38號)’는 복원 작업을 거쳐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지 진열관으로 다시 태어났다.

최근 중국의 내륙지역 개발이 심화됨에 따라 충칭과 한국 간 경제 교류와 문화 협력도 날로 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한국의 정계 인물과 주요 인사, 기업 총수를 비롯해 한국과 중국의 많은 관광객들이 매년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 진열관을 찾고 있다. 그 가운데 진열관은 중국과 한국이 역사적인 우정을 확인하는 자리이자 충칭과 한국 간 경제·문화 교류의 중요한 매개체가 되고 있다. 2017년 12월 16일 문재인 대통령은 중국 국빈 방문의 마지막 코스로 충칭을 택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지를 돌아본 뒤, 전시관 방명록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우리의 뿌리입니다. 우리의 정신입니다”라는 글귀를 남기기도 했다.

올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를 기념해 중국 각지의 임시정부 유적지와 기념관은 양국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한 다양한 행사를 기획하고 있다. 이 같은 활동은 양국이 혁명을 위해 함께 싸웠던 역사를 되돌아 보고, 신 시기 양국 국민들이 이어갈 우호 교류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소중한 계기가 될 것이다.

글|장진원(張勁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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