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쿠촌의 이주자들을 위한 비영리주택 사진/ 장쥔
중국의 빈곤탈출에서 다른 지역으로 옮김과 현지 산업의 육성은 2 가지 중요한 길이다. 2018년 말, 윈난(雲南)성 누장(怒江)주 궁산(貢山)현에 사는 약 4100명의 두룽(獨龍)족은 전 주민이 빈곤 상태에서 벗어나는 ‘탈빈’에 성공한 것은 바로 이 2가지 길을 걸어왔기 때문이다.
상상도 못했던 새 집 마련
28세의 두룽족 청년 탕샤오충(唐小聰)과 그의 아내는 두룽장향 마쿠(馬庫)촌 입구에서 눙자러(農家樂, 농촌 체험형 민박)를 운영하고 있다. 매달 평균 소득은 5000-6000위안. “생활하는 데 문제가 없다. 앞으로 더욱 살기 좋아질 것이다.” 두 부부는 서로를 마주보며 미소 지었다.
어린 시절의 탕샤오충은 사방에서 바람이 새어 들어오는 대나무 집에서 살았다. 여름이면 비가 새고 겨울이면 습기와 한기가 뼛속으로 파고 들었다. 현정부 소재지(현성)가 있는 곳으로 가 중학교에 다니기 전까지 탕샤오충은 한 번도 흰 쌀밥을 먹어본 적이 없었다. 집에서 현성까지는 3-4일을 걸어야 하는 거리로, 겨울에는 눈 쌓인 산을 지나야 하기 때문에 안에 있는 사람들은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바깥 사람들은 들어갈 수가 없었다. 겨울방학은 하는 수 없이 학교에서 지내야만 했던 탕샤오충. “지금은 이곳에도 도로와 터널이 생겼다. 인터넷은 고향의 가족들과 외부 세계를 이어주었고, 인터넷을 통해 바깥 세상의 상품은 안으로 들어가고, 고향 사람들의 농산품은 밖으로 나올 수 있게 되었다. 최근 몇 년간 이곳에서 일어난 발전과 변화는 보는 이를 흥분시킨다.” 탕샤오충의 말이다.
탕샤오충은 어린 시절 가족들이 몇 년에 한 번씩 땅을 개척했던 일을 기억하고 있다. 수시로 살 곳을 옮겨야 했으므로 생활은 극도로 불안정했다. “제일 먼저 옮겨간 곳은 산 허리의 두두(獨都)촌으로 대나무 집에서 살았다. 그 다음에는 라오마쿠 도로 변으로 옮겨가 나무판자 집에서 살았고, 그 다음에는 800m 옮긴 곳에서 나무판자와 철판으로 지은 집에 살았다. 네 번째 이사는 2014년의 일이다. 그 때 지금의 마쿠촌으로 왔다.” 그 전과 달리 탕샤오충 가족이 마쿠촌에서 선택한 집은 벽돌집이었다. 거실 하나에 방 3개, 널찍한 주방까지 딸린 집이었다. 탕샤오충은 “돈은 모두 정부에서 부담하고 우리는 한 푼도 쓰지 않았다. 우리는 노동력만 제공하면 됐다. 이렇게 좋은 집에서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부모님은 상상조차 못 했었다”고 말했다.
멀리서 내려다 본 유럽 전원 스타일의 추나퉁(秋那桶)촌
장쥔 부부장에 따르면, 윈난성은 2010년부터 두룽장향, 두룽족 주민 전체를 대상으로 한 빈곤구제행동을 추진했고, 이를 통해 두룽장은 크게 달라지게 되었다. 일례로, 2014년 두룽장 강 양 변에 안치점(安置點)이라 불리는 보장성주택단지 26개, 안거방(安居房)이라 불리는 비영리주택 1068개가 마련되었다. 이에 따라 두룽장향의 모든 두룽족들은 대나무 집〮나무판자 집 등과 작별하여 새 마을 새 집에 살 수 있게 되었다. 이른바 ‘안거공정(安居工程)’은 두룽장향 전체 주민의 주택문제를 일거에 해결했고, 그 수혜자 중 한 사람이 바로 탕샤오충과 그의 부모였던 것이다.
타지에서 공부를 하고 군에서 복무를 했던 경험은 탕샤오충의 시야를 넓혀주었다. “음식은 깨끗하고 맛있어야 할 뿐 아니라 가격 또한 합리적이어야 한다. 관광객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어야만 계속해서 발전할 수 있다.” 탕샤오충은 이제껏 눙자러 광고를 해본 적이 없다. 그의 눙자러를 찾는 관광객들은 모두 지인의 소개를 통한 이들이다.
탕샤오충에게는 사랑스러운 딸이 있다. “딸 아이가 자라 좋은 대학에 입학했으면 좋겠다. 잘 배운 뒤 다시 돌아와 우리 두룽족의 고향을 계속해서 건설해주길 바란다. 그 때가 되면 내 고향은 분명 더욱 살기 좋은 곳이 되어 있을 것이다.” 탕샤오충의 말이다.
두룽장향의 거리 사진/ 마리
이곳은 희망을 주었다
새벽 5시. 아직 단잠에 빠져 있는 두룽장향이지만, 음식점 장볜리장(江邊麗江)은 벌써 한참 전에 불을 밝혔다. 이제 곧 식당을 찾을 손님들을 위해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28세의 탕자자(唐佳佳)와 34세의 주광웨(朱光躍). “매일 아침 5시에 일어난다. 두룽장에 오고 10년 간 한 번도 어긴 적 없는 습관이다.” 탕자자가 시원스럽게 말했다.
탕자자는 17살이던 2008년 친척을 따라 리장에서 두룽장향으로 왔다. “두룽 사람들은 그다지 장사를 하지 않는다. 여기서 장사를 하는 사람들은 리장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두룽장의 모든 가게는 면세다. 점포 임대료도 비싸지 않기 때문에 장사를 하기에 별 부담이 없다.” 이곳에 남기로 한 가장 큰 이유에 대해 탕자자는 인심과 포용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어머니와 함께 노점상을 꾸리다가 지금의 깨끗한 점포를 갖게 된 탕자자는 최근 두룽장의 인프라와 장사 환경이 눈에 띄게 개선되고 있음을 느낀다. “10년 전에는 먹을 걸 만들어 놓고 다 팔지 못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방법이 없으니 손수레를 끌고 마을 안으로 들어가 팔아야 했었는데, 지금은 완전히 달라졌다. 아침 식사 종류가 전보다 다양해진 덕에 매일 아침 식사를 하러 온 손님들이 줄을 잇는다.”
여성들이 직접 짠 누탄(怒毯)은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관광상품이 되었다. 사진/ 마리
2016년 친척의 소개로 6세 많은 주광웨를 알게 된 탕자자는 건실하면서도 자신과 잘 맞는 그와 부부의 인연을 맺었다. 두 사람은 현재 함께 리장식당을 운영 중으로, 수입 또한 괜찮은 편이다. 탕자자는 “지금 누장에 도로를 건설 중이라 많은 관광객들이 들어오지 못하고 있음에도 1년에 순수익만 10만 위안이다.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사랑하는 사람도 만났고 귀여운 자식도 있고 또 돈도 벌 수 있으니,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평범한 행복이 아닌가 싶다.” 주광웨에게 두룽장은 제2의 고향이나 다름 없다. “이곳에서 더 큰 꿈이 생겼다. 누군가 내게 이곳에서 얼마나 더 일할 것인지 묻는다면, 10년은 너무 짧고 20년도 부족하다고 말할 것 같다.” 탕자자와 주광웨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