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교육학자 구밍위안 사진/궈사사(郭莎莎)
2019년 5월의 어느 날, 기자는 베이징(北京)사범대학을 찾아 이곳의 원로 교수이자 박사지도교수이며 중국교육학회 명예회장을 맡고 있는 구밍위안 교수를 만났다. 중국 교육계에서 ‘구밍위안’은 그야말로 명성이 대단한 인물이다. 신중국에서 교육사업에 종사한 1세대 중 한 명이며 동시에 신 중국에서 비교교육학과를 창설한 사람 중 하나가 바로 그다. 1949년부터 현재까지 중국의 모든 중요 교육개혁을 목격하고 그 과정에 참여하기도 했던 그는 수 많은 저서들을 남기며 중국 교육이론과 정책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올해로 90세를 넘긴 구밍위안은 백발이 성성하지만 여전히 총기 넘치는 눈빛과 예민한 사고를 가지고 있다. 사무실에서 만난 우리에게 그는 다채로우면서도 깊이 있는 내용들로 신중국 교육계 70년 발전 맥락을 짚어주었다. ‘학위인사, 행위세범(學爲人師, 行爲世範·사람의 스승이 되기 위하여 배우고, 세상의 모범이 되도록 행한다)’, 교육계의 거장으로 불리는 그의 인생철학을 느끼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1990년 8월 22일, 베이징에서 열린 <교육대사전> 출판기념회장에서 구밍위안 편집장이 발언하고 있다. 사진/ 구밍위안 본인 제공
해방이 맺어준 교육과의 인연
구밍위안은 양자강변의 작은 도시 장쑤(江蘇)성 장인(江陰)에서 태어났다. 가정형편은 나쁘지 않았으나 항일전쟁이 발발하면서 가족과 집 대부분을 잃어야 했다. 일본인을 피해 이곳 저곳을 전전하던 상황에서 구밍위안은 제대로 된 공부를 할 수 없었다. 가장 힘들었던 일년, 안식을 취할 수 있었던 것은 몇 개월 간의 사숙생활(私塾)이 전부였다. 구밍위안에 따르면, 그 당시 사숙의 한 스승은 그에게 <대학(大學)>을 읽도록 시키기만 할 뿐 해설은 해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수 개월을 지낸면서 기억에 남은 것은 ‘대학지도, 재명명덕, 재친민, 재지어지선(大學之道, 在明明德, 在親民, 在止於至善·대학, 즉 큰 배움의 길은 밝은 덕을 밝히는 데 있고, 백성을 내 몸처럼 가까이하는 데 있으며, 지극히 좋은 선에 머무는 데 있다)’구절 뿐이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이 구절의 뜻을 아는 듯 모르는 듯 했지만 구밍위안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이 구절은 인생 방향을 인도하는 나침반이 되었다.
1942년이 지나면서 구밍위안은 비교적 안정적으로 배움을 이어갈 수 있었다. 성적은 늘 상위권이었지만 그 당시 가족 생계가 곤란해졌던 탓에 대학 진학은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크게 낙심했었다. 그러다가 1948년 가오카오(高考, 중국의 대학수학능력시험)에 응시했다. 그 당시만 해도 혈기 왕성했던 때라 ‘공업구국(工業救國)’의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칭화(清華)대학 건축과, 상하이(上海) 자오퉁(交通)대학 운수관리학과 같은, 그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가장 좋은 대학교의 가장 좋은 학과에 지원했지만 낙방했다.” 대학 입학 실패는 오히려 그의 삶을 달라지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대학 진학 실패 이후 그는 지인의 소개를 받아 상하이 사립 초등학교인 룽하이(榮海)소학교의 교직원이 되었다. 짧은 재직기간이었지만 그는 교직원이라는 직업에 큰 애착을 느꼈다.
1949년, 중국 대부분의 지역이 해방구(解放區)가 되었다. 바로 그 해 구밍위안은 가오카오에 재도전했고, 이 때는 사범교육 분야에서 명성이 자자했던 베이핑(北平)사범대학(현 베이징사범대학)을 선택했다. 같은 해 8월, 입학통지서를 받은 구밍위안은 짐을 싸 베이징으로 떠났다.
아직 신중국 건국 전이었던 당시, 구밍위안 기수의 신입생이 입학한 뒤 제1회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가 개최되었다. 대학 신입생들은 모두 제등행렬을 함으로써 정협 개최를 축하했다고 그는 떠올렸다. 신 중국 개국대전 첫 날이었던 1949년 10월 1일, 구밍위안은 동기들과 함께 이른 아침부터 톈안먼(天安門) 앞에 모였다. “중화인민공화국, 중앙인민정부가 성립되었습니다!” 오후 3시 정각이 되자 톈안먼 성루(城樓)에 오른 마오(毛) 주석이 신중국 개국을 선포했고, 곧이어 오성홍기가 높이 솟아올랐다. 모두의 가슴에 형용할 수 없는 감동이 벅차 오르는 순간이었다.
1974년 구밍위안(우측 두 번째)은 제18회 유네스코 총회에 참가했다. 사진/ 구밍위안 본인 제공
신중국 1세대 유학생
신중국 건국과 함께 그 동안 지체되었던 모든 일들이 추진되면서 수 많은 건설인재가 필요해졌다. 가난하고 낙후한 현실에서 빠르게 벗어나기 위해 중국공산당은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국가로 많은 유학생을 파견, 선진적인 과학문화와 관리경험들을 배우게 했다. 구밍위안 또한 그들 중 한 명이 되었다.
1951년, 베이징사범대학은 구밍위안을 옌징(燕京)대학에 가서 유학 시험을 보도록 배정했다. 순조롭게 시험에 통과한 구밍위안은 1951년 8월 말 300여 명의 중국 학생들과 함께 유학길에 올랐다. 부푼 꿈의 그들은 10여 일의 긴 여정 끝에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다시 이틀 뒤, 구밍위안은 같은 학교 출신 두 명과 함께 모스크바 국립 교육대학교(현 모스크바 국립 사범대학)로 보내졌다.
외국에서 고등교육을 받는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구밍위안과 그의 학우들이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러시아어를 열심히 배우고 러시아어 환경에 익숙해지는 것이었고, 그 다음에는 소련의 동급생들과 함께 공부를 하는 것이었다. “소련의 대학교들은 원서를 배우고 토론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것을 ‘세미나’ 라고 한다. 정치이론은 소련공산당사 2년, 정치경제학 2년, 철학 2년을 포함해 6년 동안의 커리큘럼으로 구성되어 있다. <공산당사>에만 소련공산당사 중앙에서 편제한 교과서가 있을 뿐 다른 과목들은 지정된 교과서가 없다. 선생님들은 학생들에게 마르크스와 스탈린 등 지도자들의 많은 원서들을 읽도록 한다.” 구밍위안의 말이다.
이러한 학습방식은 구밍위안에게 있어 매우 고된 것이었다. “소련 학생들이면 하루 만에 읽을 책을 우리들은 2-3일이 걸려도 완독하지 못했다. 세미나에서 발표를 하기 위해 우리는 꼭 사전에 원고를 준비해놓아야 했다. 연장학습, 추가학습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이 같은 학습방법은 구밍위안에게 적지 않은 것을 남겨주었다. 특히 원서를 정독하는 습관은 소련 유학기간 중 얻은 최대의 수확이었다. 이후 문제연구나 논문발표가 있을 때마다 그 당시 마르크스·레닌주의와 교육이론 원서를 읽었던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소련의 사범교육은 학과 전문이론과 교육 전문이론에 대한 공부를 중시했다. 구밍위안이 소속된 교육학과의 목표는 중등사범학교 교육학·심리학 교사 및 소학교 교사를 양성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광범위한 기초지식을 중요하게 여겼다. 구밍위안 또한 소련 유학시절 해부학·생리학·아동문학·소련문학·세계사 등에 대한 지식을 광범위하게 섭렵했다. 소련대학에서의 충실하면서도 다채로웠던 생활은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1956년 7월, 5년 여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베이징으로 돌아온 구밍위안은 베이징사범대학 교육과로 배정되었다. 1950년대 중국에서 일었던 ‘소련유학 열풍’, 유학생들은 신중국 각 분야 건설의 리더가 되었다.
2019년 4월, 구밍위안은 모교인 청장중신(澄江中心) 초등학교를 방문해 학생들과 단체사진을 찍었다. 사진/ 구밍위안 본인 제공
중국 교육법제 건설에 참여
중국공산당 중앙은 1980년 12월 3일 <소학교육 보급에 있어 약간의 문제에 관한 결정>을 발표함으로써 중국 보급교육의 서막을 열었다. 당시 구밍위안은 교육투입에 대한 국가의 명확한 규정이 없고 교사 합격률이 매우 낮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구밍위안은 이에 전국교육공회가 주관하는 <교공월간(教工月刊)>에 <교육입법, 잠시도 늦출 수 없다(教育立法刻不容緩)>라는 제목의 글을 쓰며 빠른 교육입법을 호소했다.
1985년, 중국공산당 중앙과 국무원은 <교육체제 개혁에 관한 결정>을 통해 전국적으로 9년 의무교육을 시행하겠다는 내용을 알렸다. 이 같은 결정이 나오기 앞서 중앙정부는 여러 차례의 좌담회를 개최하여 전문가 및 교육부처의 의견을 청취했는데, 구밍위안 역시 자문대상 중 한 사람이었다.
구밍위안은 당시 두 개 부분에서 논쟁이 일었다고 회상했다. “첫째, 중국의 그 당시 경제발전수준이나 재정능력으로 9년 의무교육을 보급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였고, 두 번째는 의무교육을 전부 무상으로 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였다.”
첫 번째 문제와 관련하여 구밍위안은 비교적 보수적 입장이었다. 그는 초등교육을 먼저 제대로 보급한 뒤에 이를 토대로 중등교육을 보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금에 와서 보니 이 같은 염려는 기우였다. 1990년대 말 전국의 85% 지역에 9년 의무교육이 보급되었다. 결심만 하면 모두가 힘을 모아 임무를 완성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두 번째 문제에 있어서 구밍위안은 의무교육 전액 무료를 주장한 반면, 일부 전문가들은 경제가 아직 미발전한 상황을 고려해 학비는 면제하고 ‘잡부금’은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훗날 정책 시행과정에서 잡부금 또한 가난한 산간지역 가정에는 상당한 부담이라는 것이 확인되었고, 이후 2006년 <의무교육법>이 개정되면서 의무교육 전액 면제가 명시되었다.
당시의 일을 떠올릴 때마다 구밍위안은 복받쳐 오르는 감정을 느낀다. “원래 <교육기본법>이 상위법이고 <의무교육법>이 하위법이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의무교육법>이 먼저 나왔고, 때문에 그 영향력이 더 크다. 이 점만 보더라도 중국이 의무교육 보급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 알 수 있다.”
국가교육위원회는 이후 베이징사범대학에 각국 교육이법에 대한 비교연구를 위탁했다. 당시 베이징사범대학교 부총장으로 부임했던 구밍위안은 교육과와 외국 교육연구소의 동료들로 구성된 입법연구팀을 꾸려 <교육기본법>, <고등교육법>, <교사법> 등의 입법업무를 추진했다. 1990년대 초에 이르러 구밍위안은 또 다시 <학위법> 초안 연구과정에 참여했다.
교육분야에서의 성망과 공헌이 있었기에 구밍위안은 수 많은 국가급 교육위원회들이 가장 먼저 찾는 전문가가 되었지만, 많은 초청장 가운데 그가 가장 중시하는 것은 역시 국가교육자문위원회 위원 초청서다.
2010년 <국가 중장기 교육개혁과 발전규획요강(2010-2020)>이 발표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국가교육자문위원회가 설립되었다. 국가교육자문위원회는 각계 인사 및 고등교육기관 학자들을 소집했고, 구밍위안은 제1팀에 초빙되었다. 제1팀은 바로 ‘소질교육개혁추진팀’의 팀장 격이었다. 제1팀에 소속된 이후 구밍위안은 중국 전국을 돌아다녔다. 소질교육 관련 수 십 개 프로젝트를 조사연구 했고, 중서부 기초교육 발전수준을 확인했다. 이 같은 경험은 그가 중국 교육사업 발전의 거대한 성과와 잠재력을 몸소 느끼는 계기가 되었다.
“현재의 중국교육은 양적 발전에서 질적 발전으로의 핵심 전환기에 놓여 있다. <국가 중장기 교육개혁 및 발전규획요강>에 따라 우리는 교육평등과 교육의 질 제고를 중점적으로 실현해야 한다. ‘입덕수인(立德樹人·덕을 세우고 사람을 심는다)’은 교육의 근본적인 임무다. 미래에는 소질교육을 추진해야 하고 학생들의 종합소질을 제고해야 한다. 또,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재미있게 공부하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해야만 시대가 필요로 하는 인재를 양성할 수 있다.”
새시대 교육사업의 기틀 마련
구밍위안은 중국 교육학계의 권위자다. 그는 몸소 신중국 비교교육학의 재건 작업에 참여했으며, 평생교육 등 현대교육사상 도입에 앞장섰고, 현대 교육이념을 창립했다. 그러나 구밍위안 그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업적은 바로 두 권의 기초성 서적 출판이다. “60여 년의 교육생애에 있어 내가 가장 기쁘게 생각하는 두 가지가 있다. 바로 내가 주편한 <중국교육대백과사전>과 <교육대사전>이다.”
1986년 11월, 중국교육학회가 우한(武漢)에서 연차총회를 개막했을 당시 장청셴(張承先) 학회 회장과 뤼싱웨이(呂型偉) 부회장이 구밍위안을 찾았다. 중학교 교사들을 위한 <교육대사전> 편찬 작업을 맡아 교사들의 업무수준을 높여달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서였다. 교육계 선후배들의 큰 기대 속에 구밍위안은 학회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이는 신중국 최초의 대형 교육전문사전이었다. 방대(大)하고 빠짐 없으며(齊) 새로운(新) 특징을 드러내고, 교육과학발전의 새로운 성과와 중국 교육개혁 및 발전의 새로운 성취를 최대한 반영해야 했다.”
<교육대사전>은 과거와 현재에 걸쳐 중국과 외국의 교육과학연구 성과를 망라했고, 전 시리즈가 체계적이다. 1992년 가을 2만5000개 단어가 수록되었고, 전체 800만자, 12권으로 나뉘어 출간되었다.
<교육대사전> 분권(分卷) 출간이 끝난 뒤 합본을 해 출판하는 것이 본래 목표였다. 이에 구밍위안은 연구팀을 이끌고 분권 합본 준비작업에 착수했고, 6년 뒤인 1998년에 이르러서야 <교육대사전> 개정합본작업이 마무리되었다.
<교육대사전> 출간 총책임자였던 구밍위안은 사전 편찬을 하며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1987년 <교육대사전> 제2차 편찬위원회가 소집되었을 때, <사해(辭海)>의 주편을 맡았던 옌치룽(嚴其龍)에게 도움을 청한 적이 있었다. “옌치룽 선생께서 말씀하셨다. 옛날 누군가 말하기를 벌해야 할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사전 편찬을 맡기라 했다고. 사전 편찬 12년 동안 옌 선생의 그 말을 실감했다.”
힘든 과정의 연속이었지만, 그럼에도 그가 가장 보람을 느끼는 것은 <교육대사전>이 많은 교육 종사자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다는 점이다. 제1권 출간 후 1차 발간 부수만 5만부가 넘었을 정도였다. 이와 함께 현재 다수 석·박사 논문에 등장하는 교육명사 해석에 <교육대사전>이 자주 인용되고 있다. <교육대사전>은 또 중국교육과학 제2회 우수성과상 1등상, 제3회 국가도서 지명상, 제3회 오옥장상(吳玉章獎) 1등상 등 많은 상을 수상했다.
2001년, 구밍위안은 또 다른 편찬팀을 조직하며 새로운 ‘장정(長征)’을 시작한다. 바로 <중국교육대백과사전> 편찬이다. 12년 간의 수정과 수정을 거쳐 2012년 12월 700만자 분량의 <중국교육대백과사전>이 모습을 드러냈다. “<중국교육대백과사전>은 <교육대사전>의 자매편이다. 상호 참조하며 보완할 수 있고, 교육과학 및 교육실천영역의 구조체계를 대부분 담았다. 나에게는 영향력이 가장 크고 학술성이 가장 높은 저작물이라 할 수 있다.” <교육대사전>과 <중국교육대백과사전>을 이야기하는 구밍위안의 얼굴에 감동과 자부심이 묻어났다.
중국인이 스승을 표현할 때 ‘부지런한 정원사(辛勤的園丁)’라는 표현을 자주 쓰는 것처럼, 구밍위안은 교육이라는 밭을 일구는 데 있어 잠시도 여유를 가진 적이 없다. <중국교육대백과사전>을 완성한 뒤 얼마 지나지 않은 2014년 봄, 85세의 그는 <중국교육의 길, 어디에 있나 (中國教育路在何方)>를 집필하며 교육사업에 몸바쳐 온 일생의 감회와 함께 교육사업 발전에 대한 기대감을 전했다. 동시에 만담(漫談)이었지만 학술계를 포함한 많은 이들의 마음 속 소리를 전달했다.
벌써 구순을 넘긴 구밍위안. 그의 제자들 마저 대부분 은퇴를 했지만 구밍위안은 여전히 이른 아침부터 하루를 시작한다. 교육사업을 위해 끝까지 힘을 보태며 자신만의 ‘대학의 길(大學之道)’을 걷고 있는 그다.
단단하고 곧은 소나무 같은 사람이 되길,
어디에나 뿌리내리는 풀에게서 배우길,
수 많은 강을 품는 바다처럼 타인을 대하길,
소리 없이 만물을 적시는 이슬비처럼 모든 일을 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