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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입설(程門立雪), 스승을 존중하는 중국인의 전통


2024-03-19      


스승을 존중하고 교육을 중시하는 것은 중국의 전통 미덕이다. 고대부터 중국인들은 스승을 하늘, 땅, 군주, 가족과 같이 존경했다. ‘한번 스승이 되면 평생 아버지와 같이 모셔야 한다(一日為師, 終身為父)’는 말은 교사라는 직업의 중요성을 잘 보여준다. 중국 고대의 <예기(禮記)>는 세계 최초로 교육과 가르침을 주제로 한 저술로, ‘스승을 존중하고 교육을 중시한다(尊師重教)’는 말 역시 여기서 나왔다. 이는 오직 스승을 존경함으로써 도를 중시할 수 있고, 오직 도를 중시함으로써 학습과 교육을 중시하게 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오늘의 주제인 ‘정문입설’이라는 성어 역시 스승에 대한 존중에 관련된 이야기다.


유래와 의미

‘정문입설’은 <송사·양시전(宋史·楊時傳)>에서 유래한 성어다. 원문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양시(楊時)가 정이(程颐)를 만나뵙기 위해 낙양(洛陽)으로 갔다. 당시 그의 나이는 40세 정도였다. 정이를 찾아갔을 때 그는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양시는 유작(游酢)과 함께 문 앞에 서서 떠나지 않고 기다렸다. 정이가 깨어났을 때 문 밖에는 이미 눈이 한 척 이상 쌓여 있었다. 아주 짧은 이야기이지만 이는 중국 교육사의 미담 중 하나로 오늘날에도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에도 실려있다.


송나라 시기, 정호(程颢)와 정이라는 두 형제가 있었다. 두 형제는 독서량이 많고 뛰어난 경륜과 깊은 학식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명성을 듣고 배움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매일같이 끊이지 않았다. 당시 양시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어려서부터 영민하고 배우기를 즐겼다. 그는 4살에 책을 읽기 시작했고 7살에는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릴 수 있었으며, 8살에는 운율이 있는 사(詞)와 부(賦)를 짓고 읊었다. 사람들은 그를 신동이라 했으며, 그의 이름은 널리 알려졌다.


양시는 지식에 대한 욕구가 매우 강하고 스승을 존중하며 도를 중시하는 사람이었다. 어느 겨울 날, 그와 학우는 어떤 문제에 대해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지게 되었고, 정확한 답을 찾기 위해 정이에게 가르침을 받으러 갔다. 정이의 집에 도착했을 때, 시중 드는 아이가 문 앞에서 그들에게 말했다. “정이 선생님은 지금 주무시고 계시니 먼저 돌아가시고 다른 날 오시지요.” 양시와 친구는 스승을 깨우거나 방해하지 않으려고 문 앞에 조용히 서서 그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렸다.


한 겨울 매서운 추위 속에 길에는 한 사람의 행인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때 하늘에서 함박눈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차가운 바람이 계속해서 옷을 뚫고 들어오는 바람에 두 사람은 추위에 몸을 벌벌 떨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닥에는 두터운 눈이 쌓였다.


시중드는 아이가 그들에게 일단 집에 돌아가라고 했지만 그들은 떠나지 않고 눈밭에 서서 스승이 깨어나기만을 기다렸다. 잠에서 깨어난 정이는 양시와 친구가 가르침을 구하기 위해 문 밖에서 눈을 맞으며 서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매우 감동하여 직접 그들을 맞으러 나갔다. 문을 열어 보니 바깥에는 이미 눈이 한 척이나 쌓여 있었다. 미동도 없이 그곳에 서 있던 양시와 친구는 흡사 눈사람 같았다.


정이는 학문을 갈구하는 양시의 간절함과 예의 바른 모습을 보고 매우 기뻐하며 양시를 제자로 받아들였고, 자신의 자랑스러운 애제자로 키웠다. 후에 양시는 정이의 사상과 도리를 배워 깨달아 ‘정학의 전통파(程學正宗)’로 존경받고 ‘귀산선생(龜山先生)’이라 불렸다. 이렇게 ‘정문입설’ 이야기는 스승을 존경하고 도를 중시하는 내용의 영원한 미담으로 남게 되었다.


스승 존경과 교육 중시는 중화 문화의 핵심

중국 역사에는 스승을 존경하는 전통과 관련된 많은 이야기들을 찾아볼 수 있는데 ‘정문입설’은 가장 대표적인 실례이다. 또 다른 예로 ‘자공결려(子貢結廬)’가 있다. 자공(子貢)은 교육가, 사상가인 공자의 뛰어난 제자였다. 기원전 479년 공자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공자 서거 후 모든 제자들은 3년 동안 상복을 입고 이후 제 갈 길을 갔지만, 자공만이 무덤 옆에 오두막을 짓고 6년 동안 무덤을 지켰다. 이와 같이 제자로서의 깊은 정과 스승에 대한 진실한 존경심을 드러낸 자공은 스승에 대한 효도를 실천한 모범적 인물로 꼽힌다. 후대인들은 이 일을 기억하기 위해 3칸짜리 집을 짓고 비석을 하나 세워 ‘자공려묘처(子貢廬墓處)’라 이름하였다.


중국의 전통 사회는 이익보다 의를 중시했고, 교사라는 직업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중국 고대에서 스승을 모시는 도리는 예(禮)를 통해 실천했다. 남성이 20살이 되면 치르는 가관례(加冠禮)는 그가 성년이 되었음을 뜻했다. 호칭의 경우, 가족이나 친척이 ‘자(字)’를 선물하며 그때부터 자로 호칭함으로써 그에 대한 존중을 표했다. 조정에 들어가 관직을 맡게 되었을 때에도 황제는 이름이 아닌 그의 자로 호칭하며, 그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부모와 스승 뿐이었다. 또한 고대 사람들은 서당에서 공부를 할 때 먼저 스승에게 정중히 절하는 예를 갖춰야 했다. 예를 갖추는 것은 학생 뿐 아니라 학생의 부모 역시 마찬가지여서, 스승에게 무릎을 꿇고 절해야 했다. 집에서 가장 존중을 받는 부모조차 스승에게 무릎을 꿇고 절하는 예를 갖추는 것을 통해 스승에 대한 존중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아이들은 ‘스승을 존경하고 교육을 중시해야 함’을 더욱 깊이 배웠다.


한유(韓愈)는 <사설(師說)>에서 “예로부터 가르침을 구하는 자들에게는 반드시 스승이 있었다. 스승이란 도를 전하고 학문을 가르치며 난제를 풀어주는 자 (古之學者必有師。師者, 所以傳道受業解惑也)”라고 했다. 이 글은 한유가 그의 제자인 이반(李蟠)에게 써준 것으로, 당시 스승을 따르고 학습에 열중하는 사회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또한 스승을 존경하는 고대 전통은 ‘명덕(明德)’,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는 유교의 예를 담고 있으며 민족의 커다란 사명을 어떻게 담당할지에 대해 전하고 있다.


옛날과 비교해 오늘날 중국에서는 많은 예의와 전통이 사라졌지만 스승을 존중하고 교육을 중시하는 사회 분위기는 변하지 않았다. 곡예(曲藝)나 서예 등과 같은 분야에는 아직 스승을 모시고 예술을 배우는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오늘날 스승을 존중하고 교육을 중시하는 모습은 주로 학교에서 발견할 수 있다. 선생님은 여전히 위대하고 영예로운 직업으로, 원정(園丁)이라 불리며 세대를 거쳐 학생들을 교육하고 양성한다. 어느 시대이든지 스승을 존중하고 교육을 중시하는 것은 중화 문화의 중요한 부분이다. 민족의 전승, 미래와 밀접히 연관된 일이기 때문이다.

 

글|칭산(靑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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