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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축선을 따라 거닐다


2024-02-18      

고궁 오문 앞에서 비둘기들이 날아 오르고 있다. 사진/VCG


중축선 하나로 베이징(北京)의 유구한 역사와 현대 도시 생활이 연결 된다. 베이징 중축선 위에 있는 건축물 하나하나가 고색창연한 중국의 역사와 문화를 보여주고, 과거와 현대가 교차하고 융합된 축소판이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도 중국인이 추구하는 조화와 질서, 균형의 가치관을 고수하고 계승하고 있다.


종소리와 북소리가 울리는 고도(古都)

중축선 여행은 750여 년 베이징을 지켜본 종루(鐘樓)와 고루(鼓樓)에서 시작된다.


종고루(鐘鼓樓)는 종루와 고루를 합친 말이다. 고대 중국에서 도시 관리 기능을 담당한 중요한 건축물 중 하나로 중국의 모든 고성(古城)에 거의 다 있다. 시간을 정확하게 전달해 만민이 제때 일하고 휴식하도록 하는 것은 왕조의 통치 권위와 연관되어 있다. 청나라는 통행금지를 엄격하게 시행했다. 통행금지 시간은 보통 저녁 7~9시(1경)에서 다음날 새벽 3~5시(5경)까지였다. 위로는 왕족이나 귀족부터 아래로는 일반 백성까지 야간에 통행을 할 수 없었다. 통행금지는 먼저 북을 치고 나중에 종을 쳐서 알렸다. 1경이 되어 종소리가 울리면 성문이 닫히고 교통이 중단돼 크고 작은 길은 서서히 고요해졌다. 5경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면 성문이 열리고 행인과 마차가 길을 따라 들어와 도시가 다시 떠들썩해졌다. 북소리와 종소리에는 사회 질서에 대한 중국인의 숭상심이 담겨있다.


청나라의 통치가 끝나고 민국시대에 시계가 보급되면서 종고루는 황가 통치의 위엄이라는 상징성이 사라졌고, 시간을 알려주는 기능도 점차 약화됐다. 1924년 펑위샹(馮玉祥)이 ‘베이징정변’을 일으키고 고궁(故宮)에서 푸이(溥儀)를 축출했다. 그때부터 일반 백성의 생활의 일부였던 북소리와 종소리도 중단됐다.


위엄이 사라진 종고루는 사회 교육 기능을 담당하는 장소로 변모되기 시작했다. 1925년 ‘징자오(京兆) 통속교육관’이 고루에 설치됐고, 관내에 도서 열람실, 강의실, 전시실 등을 마련해 대중에게 현대 문화 지식을 가르쳤다. 고루와 종루 사이에 있던 공간은 공원으로 개조해 꽃과 나무를 심고 운동 기구도 설치했다. 다음해 종루 내부에 영화관을 설치해 교육과 대중 오락을 결합했다. 이후 ‘징자오 통속교육관’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이름이 몇 번 바뀌었고 관내 시설과 전시품도 여러 차례 증설과 조정을 거쳤다. 일본 괴뢰 정부 시절을 제외하고 종고루는 늘 대중의 학습과 오락, 휴식의 중요한 장소였다.


베이징 태묘 향당에 있는 편종과 금사남목(金絲楠木) 입주(立柱). 전시된 ‘중화화종(中華和鐘) 편종’은 세계 최대 무대 연주용 쌍음 편종으로 기네스북에 올랐다. 사진/VCG


베이징의 노 젓는 소리와 돛단배 그림자

종고루에서 남쪽으로 약 500m 가면 중축선과 대운하(大運河)의 통혜하(通惠河) 구간이 만나는 곳이 있다. 여기에는 평범해 보이는 단일 아치형 돌다리가 있다. 다리 위를 지안문외거리(地安門外大街)가 남북으로 관통되어 있고, 돌다리 아래로 통혜하가 동에서 서쪽으로 흐른다. 이 돌다리의 이름은 만녕교(萬寧橋)로 1285년에 건설됐다. 베이징 중축선에서 지금까지 남아있는 유일한 원나라 건축물이다.


만녕교는 건설 당시부터 베이징의 중요한 교통 허브였다. 원나라 때에는 남북을 오가며 식량 등을 운송하던 배가 대운하에서 통혜하로 들어와 만녕교를 지나 스차하이(什剎海)에 정박했다. 고대 중국의 교통 동맥이었던 베이징과 항저우(杭州)를 잇는 징항(京杭)대운하의 중요한 항구 중 하나였던 만녕교 일대는 선박의 그림자가 하늘까지 이어졌고, 상점이 운집했으며, 사람 소리로 떠들썩했다. 그러나 이후 수백 년 동안 스차하이 수계의 수위가 낮아지고 식량 수송 노선이 변경되면서 만녕교 아래의 퉁혜하는 수송 기능을 점차 상실했다.


신중국 성립 이후 베이징시 정부는 통혜하를 암거(暗渠)로 개조하고 하천을 덮어 만녕교도 지하로 매몰해 지면 위에는 다리 면과 양쪽의 난간만 드러냈다. 같은 시기, 남과 북 양쪽에 새로운 석재로 기존의 다리를 연결해 다리 본체가 연장되어 통행 기능이 강화됐다. 2000년, 베이징시 정부는 만녕교와 주변 환경 정돈 사업을 진행해 암거를 복원했고 다리 본체도 원래 보습을 되찾았다.


여러 차례 개조를 거친 만녕교 양쪽 난간은 세 가지 재질과 색깔이 나타나게 됐다. 중앙에 약간 누렇게 바랜 황백옥 난간은 풍화된 모습이 역력한 옛 모습 그대로다. 밖으로 나온 회색 부분은 1950년대 만녕교를 개조할 때 교체한 청석 구조물이며, 제일 바깥쪽의 희고 깨끗한 부분은 2000년 만녕교 대공사 때 보수한 것이다.


오늘날 만녕교 아래의 통혜하에는 물이 흐르고 강 양쪽에는 푸른 나무가 무성하다. 강에 식량을 가득 실은 선박은 없지만 관광객들이 배에 앉아 고대 운하의 떠들썩한 풍경을 상상한다. 만녕교 위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다니는 자동차 모습도 볼 수 있다. 750년이라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도 이 오래된 돌다리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도시의 남북을 연결하면서 운송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베이징 시민이 종고루 아래서 리본을 흔들며 운동하고 있다. 사진/VCG


고대 중국에서 가장 큰 영예, 태묘 배향(配享)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면 베이징 중축선에 있는 황가(皇家) 건축군인 고궁(故宮)과 천안문(天安門, 톈안먼), 그리고 톈안먼 광장 건축군이 나온다. 이곳은 중축선을 여행하는 관광객의 필수 코스로 아침부터 저녁까지 늘 인파로 북적인다. 중국의 고대와 현대의 정치 중심지에서 역사의 변화,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건축 미학을 경험할 수 있다.


톈안먼 왼쪽에는 떠들썩한 도심 속 조용하고, 붉은 벽에 황금색 기와, 오래된 측백나무가 빽빽하게 늘어선 건축군이 있다. 많은 젊은이들은 이곳에서 웨딩 촬영을 하거나 전통 복장을 입고 촬영하는 것을 즐긴다. 이곳은 바로 중화의 효 문화와 제례의식 문화를 담고 있는 건축물인 태묘(太廟)다.


조상 공경은 예부터 내려온 전통 문화다. 원시사회 말기 씨족부락에도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풍습이 있었다. 서한 시대부터 ‘효로 천하를 다스린다’를 통치 이념으로 삼았고, 역대 왕조가 이를 이행했다. 명·청 시대의 태묘 제례 대전은 고대 중국의 제사 제도와 예의를 잘 보여준다. 매년 4월 1일, 7월 1일, 7월 15일, 10월 1일, 황제의 생일, 청명절(清明節), 황제 기일에는 태묘에서 제사를 지냈다. 매년 연말에 진행되는 조상 합제의 경우 오시(11~13시)에 시작한다. 역대 제후의 위패를 태묘 안으로 모시고 예악과 제례 무용이 펼쳐지는 가운데 황제가 신하들을 이끌고 삼궤구배(三跪九拜)의 대례를 올려 조상의 영혼에 경의를 표하고 국가의 미래와 천하 백성의 복을 기원했다. 여기서 예의 제도의 엄격함과 복잡함을 알 수 있다.


베이징 태묘와 고궁은 명나라 시기인 1420년부터 건설하기 시작했다. 남북으로 길이 475m, 동서 너비 294m로 내부에 주요 건물 3동이 있고, 황제의 먼 조상의 위패를 모신 조묘, 선조의 위패를 모신 침전과 제사를 거행하는 향당이 있다. 최근 중국 인터넷상에서는 ‘배향태묘(配享太廟)’라는 유행어가 있는데 타인의 뛰어난 능력과 공로를 인정한다는 뜻이다. 이 단어에서 ‘배향’은 사후에 위패(位牌)를 향전의 서쪽 배전에 모시는 것을 말한다. 고대 중국인에게 태묘 배향은 최고의 영예로 선정 조건이 매우 까다로웠다. 왕조에 탁월한 공헌을 한 인재만이 황가에 모셔질 자격을 얻었다. 명·청 500년 동안 이 영예를 받은 대신은 겨우 30명이었다.

톈탄공원(天壇公園)의 제례 대전 공연 사진/IC

 

1950년 이후 고대 중국에서 가장 중요한 국가 제례 건축인 태묘는 베이징시 노동인민문화궁으로 개명되어 대외에 개방됐고, 시민의 문화 오락 활동 장소가 됐다. 자오수리(趙樹理) 작가는 “고래수수대, 황제노조종. 여금수수대, 노동중제형. 세도일변화, 근본취불동. 환시저좌묘, 환료주인옹!(古來數誰大, 皇帝老祖. 如今數誰大, 勞動眾弟兄. 世道一變化, 根本就不同. 還是這座廟, 換了主人翁! 고대에는 황제 지위가 가장 높았죠. 요즘은 노동인민들의 지위가 가장 높아요. 세상이 바뀌었고 근본적으로 달라졌어요. 같은 곳이지만 주인이 달라졌네요.)”이라는 시를 지어 개명 배후에 담긴 봉건사회의 종말과 인민 지상의 사회 변화를 생동감 넘치고 위트 있게 설명했다.

스차하이에서 바라본 베이징 종고루. 베이징 중축선 최북단에 위치한 종루(좌)와 고루는 앞뒤로 배치돼 웅장한 기세를 뽐낸다. 사진/IC


겹겹이 둘러싼 성문, 폐쇄에서 개방으로

고궁을 중심으로 태묘와 대칭을 이루는 곳은 토지와 오곡에 제사를 지내는 사직단(社稷壇)이다. 이곳에서 국가 영토의 완전함을 기원했다. 여기 천안문에서 남쪽으로 계속 걸어가면 정양문(正陽門)이 나오고, 더 걸어가면 수많은 라오쯔하오(老字號, 오랜 역사를 지닌 중국 브랜드)를 탄생시킨 번화한 상업거리 전문거리(前門大街)를 지나게 된다. 다시 베이징 전통 민속 문화가 집중된 천교(天橋)를 지나면 천단(天壇)과 선농단(先農壇)이 나온다. 천단은 날씨가 순조롭게 해달라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선농단은 신농씨(神農氏)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황제는 제사가 끝나면 직접 세 번 왕복해 땅을 갈아 농사 짓는 행위를 한다. 이것으로 국가가 농사 활동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보여준 것이다. 중축선 위에 있는 대표적인 제사 건축물인 태묘, 사직단, 천단, 선농단을 보면 고대 중국인의 조상 공경, 자연 경외, 농경을 중시하는 사상을 알 수 있다.


천단과 선농단에서 다시 남쪽으로 가면 베이징 중축선의 마지막 대표 건축물인 영정문(永定門)이 나온다. 이번 중축선 여행을 돌아보면 종고루에서 우리의 발자국이 시작돼 수황문(壽皇門), 만세문(萬歲門), 신무문(神武門), 건청문(乾清門), 태화문(太和門), 오문(午門), 단문(端門), 천안문, 정양문, 영정문 등 18개 궁문과 성문을 통과했다.


베이징 중축선에서 가장 많은 건축물은 문이다. 이 가운데 중국 전통 건축의 장엄한 아름다움은 고궁의 정문인 오문에 가장 잘 나타나 있다. 오문은 통과 높이가 37.95m로 10층 건물보다 높고, 고궁 건축군에서 제일 높은 건물이다. 동·서·북 3면의 망대를 연결해 사각형으로 광장을 둘러싸 오목할 ‘요(凹)’ 자 구조를 이룬다. 정면에 보이는 세 개의 문 가운데 제일 큰 문이 황제의 전용문이었다. 황제 외에 네 종류의 사람만 평생 한 번 정문을 통과할 기회를 갖는다. 첫째는 황후다. 황제의 혼례 때 오문을 열어 황후의 입궁을 맞이한다. 나머지 세 명은 과거시험에서 1등부터 3등을 차지한 장원(壯元), 방안(榜眼), 탐화(探花)이다. 매년 전시(殿試) 결과가 발표되면 1등부터 3등은 오문을 통과해 황궁을 나선다. 이제 오문은 관광객이 고궁박물원으로 들어가는 주요 입구가 됐다. 날마다 수천수만 명의 국내외 관광객이 오문에서 관람을 시작한다.


고대에는 오문 출입에 엄격한 제한이 있었고, 지금은 사람들로 붐비는 톈안먼 광장도 과거에는 일반 백성이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천안문 앞에 석판길이 있고 길 양쪽에 ‘천보랑(千步廊)’이라는 방을 설치했다. 이곳은 관청 관리들이 일하는 곳으로 서민의 출입을 엄격하게 금지했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봉건왕조의 통치가 마감되자 천안문 앞에 있는 ‘천보랑’도 1914년 철거됐고, 도시의 동서 교통이 이곳을 관통하여 폐쇄적이었던 궁궐 광장이 일반인도 자유롭게 통행하고 머물 수 있는 개방적인 공간이 됐다.


성문은 고대 왕조의 통치를 수호하는 성채로 겹겹이 이어진 대문을 설치해 백성과 단절시켰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면서 폐쇄에서 개방으로의 변화가 이 오래된 건축물의 필연적인 운명이 됐다.


현재 중축선은 계속 연장되고 있다. 북쪽의 옌산(燕山) 자락에서 남쪽의 다싱(大興)국제공항까지 영역을 확장하면서 베이징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무한한 미래를 연결하고 있다. 

글 | 왕자오양(王朝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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