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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치와 한국의 역사 문화


2023-05-26      



해치(獬豸)는 태(廌), 해태(解廌), 해치(解豸), 신양(神羊)이라고도 불리는 고대 중국의 전설 속 신수(神獸)다. 기록에 따르면 해치는 소와 양 크기만하고 기린을 닮았으며 이마에 뿔이 나 있다. 중국 동한(東漢)시대 문헌인 <한서(漢書)>, <설문해자(說文解字)>, <신이경(神異經)> 등에 해치 관련 기록이 있다. 해치는 시비와 선악을 가리고 공정함을 추구할 만큼 지혜롭다고 한다. 동한의 사상가 왕충(王充)은 <논형(論衡)>에서 중국 전설 속 최초의 사법관인 고요가 재판을 할 때 해치를 이용했다고 한다. 만약 그 사람이 죄가 있으면 해치가 뿔로 친다는 것이다. 때문에 해치는 과거 중국에서 공정함의 상징이 됐다. 오늘날, 중국의 여러 지역의 사법기관이나 법학대학 문 앞에 해치 조각상이 있는 경우가 많다.


고대 한국에 유입된 해치 문화

해치 문화가 언제 고대 한국에 유입됐는지 고증하기는 쉽지 않다. 8세기 당나라 사신 귀숭경(歸崇敬)이 신라 국왕의 장례에 참석하기 위해 신라로 가기 전, 그의 친구 독고급(獨孤及)이 그를 떠나보내며 쓴 산문에서 귀숭경은 사법 관원으로 늘 해치관을 쓰고 다녔다고 언급했다. 해치관이란 해치 모양이나 도안이 있는 관모로, 지금으로부터 약 2000년 역사가 있다. <후한서(後漢書)> 기록에 따르면 초나라 왕이 해치를 잡았는데 해치가 시비곡직을 판별할 수 있다고 하여 해치 모양으로 모자를 만들었다. 그러나 귀숭경이 신라로 갈 때 해치관을 쓰고 갔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9세기 중엽, 신라인 최치원은 당나라를 방문했고 이후 회남도(淮南道)지역에서 관직을 했다. 당시 회남도 절도사 휘하에 해치군이라는 군대가 있었다. 최치원은 이를 기록하고 이 군대가 이름인 ‘해치’처럼 충신과 간신을 판별하고 공명정대하기를 바랐다. 신라시대에 당나라 예의 제도를 배워와서 관복에서 해치 문양이 나타나기 시작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고려 의종 시대에 국왕의 순찰을 규정한 의장에 해치가 그려진 깃발을 두어 왕실의 권위를 부각시켰다. 이 밖에 고려 후기 관원 이존비의 묘지명에 ‘치해섭물(豸獬懾物)’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생전에 관리였던 그가 공명정대했다는 뜻이다. 이로써 고려시대에 해치 문화가 이미 상류 귀족과 문인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해치와 조선조의 예의제도

명나라 건국 이후 명 태조는 관원의 의관 제도를 다시 제정했다. 사법감찰 관원은 해치관과 해치의를 착용하도록 규정했다. <세종실록> 기록에 따르면 조선 왕조도 명나라 예제에 따라 해치관을 제작했다. 특히 어사 같은 사법감찰 관원은 반드시 해치관을 쓰도록 규정했다. <단종실록>에도 당시 의정부와 예조가 <황명예제(皇明禮製)>를 참조해 사법감찰을 주관하는 대사헌의 관복 흉배 문양을 해치로 해야 한다고 건의했다는 기록이 있다.


잘 알려진 대로 조선조의 예의 규제는 매우 엄격했다. 정조 시대 이시원이라는 사법 관원이 등청하면서 규정대로 해치관을 착용하지 않아 문책을 받았다. 정조는 ‘법 집행을 담당하는 자가 해치관을 착용하지 않은 것은 직무 유기’라고 생각했다. 이로써 해치는 조선 시대 예제에서 매우 중요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관복과 관모에 해치가 있는 것 외에 해치 석상도 있다. 중국 명청 시대 왕릉의 석물에는 해치 석상이 한 쌍 있었다. 중국을 방문한 조선 연행사가 이에 대해 남긴 기록도 있다. 명청과 마찬가지로 조선 왕릉에도 해치상이 놓여 있다. 궁궐 문 앞에도 해치 석상을 놓았다. 고종 초기, 조선은 경복궁을 재건하고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 앞에 해치상 한 쌍을 세우고 해치상 안쪽 구역에서는 관리들이 말을 타지 못하게 했다. 고종은 ‘해태를 세워 한계를 정하니, 이것이 상위(象魏, 대궐의 문)다’는 전교를 내렸다. 즉, 해치는 궁궐과 왕실의 권위를 대표하는 궁궐과 외부의 엄격한 경계선이었던 것이다. 이후 일본 식민지배자들은 광화문을 철거하고 총독부 건물을 세웠으며 해치상을 옮겼다.


조선 민간에서 해치 석상은 사치품이었다. 때문에 대다수 가정에서는 저렴한 해치그림을 붙여 액운을 쫓았다. 연구에 따르면 고대 한국의 해치는 처음에는 중국의 해치와 모양이 매우 비슷했지만, 17세기 후반부터 변화가 나타나 중국 해치와 형상이 점점 달라졌다. 중국의 해치는 보통 위풍당당하고 사나운 모습인 반면, 한국의 해치는 부드럽고 귀여운 요소가 많다.


해치와 조선 문신의 정치 이상

조선 전기, 문신 서거정은 시에서 ‘기린래헌이. 해치해정상(麒麟來獻異. 獬豸解呈祥)’이라고 했다. 그가 해치를 기린과 마찬가지로 상서롭고 길운을 부르는 상서로운 짐승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조선 문관에게 해치는 상서로움 외에 청렴 결백하고 공정하며 직언하고 부정한 기풍에 맞설 수 있는 문화적 부호였다.


율곡 이이는 시에서 ‘풍불림랑명위패, 상엄해치정아관(風拂琳瑯鳴委佩, 霜嚴獬豸整峨冠)’이라며 겸손하고 공정한 군자의 품덕을 노래했다. 군자는 한편으로는 교만하지 않고 봄바람처럼 백성의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지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서릿발처럼 차가운 자세로 부정한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스스로를 바르게 세우고 돌아봐야 한다는 뜻이다.


문신 김육은 친구에게 보내는 만사(挽詞)에서 ‘악립청조해치관, 상위름렬숙천관(鶚立清朝獬豸冠, 霜威凜烈肅千官). 직신순리금하재, 호상청산하옥관(直臣循吏今何在,湖上青山下玉棺)’이라고 했다. 이로써 ‘해치관(獬豸冠)’은 직언하고 상서를 올리며, 탐관을 위협하는 대명사이고, 친구의 공적을 표현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문신 최립은 말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전쟁 기간 사신으로 명나라에 갔다. 명나라와 조선 연합군이 왜구를 격퇴했다는 소식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던 그는 시성 두보가 떠올랐다. 두보는 안사의 난 때 관군이 반역군을 물리쳤다는 소식에 즉흥적으로 명시를 남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립도 ‘대장웅비선타수, 명신해치역건상(大将熊羆先唾手, 名臣獬豸亦褰裳)’이라고 하면서 문신과 무장 모두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나라를 위해 힘쓰며 큰 실력을 발휘한 모습을 생동감 있게 표현했다. 무장이 곰처럼 위풍당당하고 용맹하다면, 문신은 해치처럼 시비를 잘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2008년, 서울시는 해치를 서울의 마스코트로 선정하고 도시 곳곳에 해치상으로 조경을 했다. 어쩌면 이는 서울을 청렴하고 공정한 곳으로 만들겠다는 결심을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다. 이 밖에 해치 관련 문화산업도 발전하고 있다. 이 기회를 통해 해치는 현대 한국에서 새로운 문화의 여정을 시작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글|위셴룽(喻顯龍), 상하이(上海)외국어대학 글로벌문명사연구소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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