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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경’이 한국 역사에 미친 영향


2023-01-28      

중국 고대 유가 경전인 효경<孝經>은 공자와 제자들이 효에 대해 말한 것을 기록한 것이다. 효도와 효치(孝治) 사상을 설명해 동아시아 지역 전체에 큰 영향을 미쳤다. 중국 서한(西漢)시대 해혼후(海昏侯)묘에서 <효경> 죽간이 발견돼 기원전 1세기 <효경>이 한나라에서 널리 읽혔음이 증명됐다. 백제 왕은 아직기를 일본으로 파견 보내면서 <효경> 등 경전을 같이 보냈다. 일본 왕자는 아직기를 스승으로 모셨고 아직기는 다시 박사 왕인을 추천해 일본으로 초청했다. 이로써 <효경>은 1800년 전에 동아시아 전체에 전파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라와 고려도 ‘효경’ 중시

7세기 중엽, 신라 선덕여왕은 당나라와의 외교를 적극 진행했고 자제들을 당나라로 유학 보냈다. 자제들이 당나라에서 배운 경전에는 <효경>이 포함됐다. 7세기 말, 신라는 당나라를 모방해 ‘국학’을 설립하고 유가 경전을 전문적으로 가르쳤다. 여기에도 <효경>이 포함됐다. 같은 시기 신라 유학자 강수는 어려서부터 <효경>을 배웠고, 문학 대가 설총은 신라 말로 9경(九經)을 읽었으며 이것으로 학생을 가르쳤다. <효경>은 ‘9경’ 중 하나였다.


8세기 중엽, 당 현종은 친히 <효경>에 주석을 달았고 이 주석판은 지금까지 유행하고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당 현종은 743년 자신이 주석을 단 <효경>을 신라 사신에게 하사했다. 9세기 최치원은 <사은표(謝恩表)>에서 현종이 <효경>을 하사한 일을 특별히 언급했다. 이 밖에 신라는 788년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를 설립하고 이를 통해 관리를 선발했다. <효경>은 필수과목 중 하나였다.


고려 시기에 이르러 조정과 귀족 문인은 <효경>을 중요시했고 왕실은 다양한 판본을 소장했다. 반면 당나라는 오랜 전쟁으로 여러 고판본이 파손됐다. 때문에 중국은 고려가 소장한 판본에 주목했다. 959년 고려는 후주(後周)에 <별서효경(別序孝經)> 1권, <월왕효경신의(越王孝經新義)> 1권, <황영효경(皇靈孝經)> 1권, <효경자도(孝經雌圖)> 3권 등을 선물했다. 북송 철종은 고려에 고서가 소장돼 있다는 말을 듣고 소장 목록을 받고 싶어했다. 고려가 보낸 소장 목록 중에 <효경유소주(孝經劉邵註)> 1권, <효경위소주(孝經韋昭註)> 1권이 있었다.


문화와 교육을 매우 중요시한 고려 문종은 왕경(王京)의 거인(舉人)들이 공부하는 서적이 대부분 전사본이고 오자가 많다는 것을 발견하고 왕실 비각에 소장된 <효경> 등 경전을 각 학원에 갖춰 열람할 수 있도록 명령했다. 고려 인종은 <효경>과 <논어> 두 책을 민간의 아이들에게 나눠주도록 명령했다. 이로써 일반 백성의 아이들도 <효경>을 접촉할 기회가 생겼다.


‘효경’과 조선 왕실의 계몽 교육

고려 고종 시기 태자는 보문각에서 <효경>을 배웠다. 조선왕조는 유가를 바탕으로 나라를 세웠고, <효경>의 계몽교육 역할에 주목했다. 조선 태종은 즉위 후 얼마 뒤 유신(儒臣)을 선발해 왕자의 시학관(侍學官)으로 삼았고 첫번째로 <효경>을 강습하도록 했다. 조선 세조는 어려서부터 총명해 5세에 <효경>을 읽기 시작했다. 때문에 세조는 즉위 후 해양대군(이후 예종)의 교육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고 8세 때부터 <효경>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세조는 또한 <효경>을 가르치는 대신들에게 특별히 상을 내리기도 했다.


중종 때 <효경>은 왕실에만 머무르지 않고 <천자문>, <소학> 등과 함께 조선 양반사회 계몽교육의 중요한 독서 목록이 됐다. 중종의 두 아들 인종과 명종도 <효경>을 공부했다. 특히 명종은 즉위 시 11세에 불과해 낮에는 <소학>을, 밤에는 <효경>을 공부했다.


효종 시기 대신 서정연은 세자가 <자치통감>을 공부하는 것을 보고 <효경>을 먼저 공부해 덕성을 수양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이로써 당시 계몽교육 사회에서 <효경>의 위치를 알 수 있다. 1691년 숙종은 <효경>과 <소학>에서 간단하고 이해하기 쉬운 글귀를 한글로 번역해 동궁 유모에게 네 살 된 세자를 가르치도록 했다. 숙종이 아들 경종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조선 정조가 어릴 때 제일 먼저 공부한 것도 <효경>이다. 당시 사도세자는 정조를 매우 아껴 직접 한자를 가르쳐줄 정도였다. 어쩌면 이것이 정조가 아버지와 나누었던 잊을 수 없는 기억일 수도 있다.


1880년, 왕세자 학교라 할 수 있는 시강원(侍講院)은 고종에게 “<효경>은 학문을 익히고 덕을 쌓는 첫걸음”이라고 지적했다. 좌의정 김병국은 “학문을 익히고 덕을 쌓는 데 처음 볼 것은 <효경>만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세자가 처음으로 배울 경전으로 <효경>을 추천했다. 송근수, 이재면, 조영하, 민태호 등 대신도 이를 찬성했다. 실제로 세자의 어머니인 명성황후도 어릴 때 <효경>을 자주 읽었다.


조선 내정에서 <효경>의 쓰임

고대 중국은 효로 천하를 다스린다는 ‘이효치천하(以孝治天下)’를 추구해 효도 윤리와 행정 통치를 결합했고, 조선왕조는 ‘이효치천하’ 사상을 충분히 흡수했다. 1399년, 태상왕이었던 태조는 고인을 위해 수륙재를 마련하고 이를 중생을 제도하는 데 사용하려고 했다. 유신들은 이를 반대하면서 정종이 나서서 말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신들은 <효경>의 ‘당불의, 즉자불가이불쟁어부, 신불가이불쟁어군(當不義, 則子不可以不爭於父, 臣不可以不爭於君)’을 근거로 들었다. 이로써 유가 관념 아래서 국왕이라고 해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으며, 유가가 제창한 효도는 부모를 무조건 따르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밖에 <효경> 사상이 일찌감치 조선 내정에서 사용됐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세종은 <효경>을 특히 중요하게 생각해 1429년 활자를 주조해 <효경>을 간행하라고 명령했다. 얼마 뒤 <효경>을 양반 대신들에게 하사했다. 1445년, 충의위 무관들에게 반드시 <효경> 등 경전을 공부하고 병조에서 심사하도록 명령했다. 1519년, 중종은 무관들도 <효경>을 반드시 공부하라고 명령했다. 이로써 <효경>은 문신과 유생의 전유물이 아니라 조선 양반사회의 보편적인 경전이 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540년, 중종은 각 도의 관찰사가 순찰을 나갈 때 반드시 <효경> 등 읽기 쉬운 책을 강연해 백성을 교화시키라고 명했다. 당시 대신 최세진이 장서를 여러 차례 왕에게 바쳤는데 그 중에는 <효경언해(孝經諺解)>, <여효경(女孝經)> 등도 있었다. 이는 <효경>이 민간 중하층과 여성 사이에도 전파됐다는 것을 보여준다.


조선 후기 문신 허전은 아버지가 직접 필사한 <효경>을 소장하고 있었다. 허전은 이를 매우 귀하게 여겼고 후세에 전하고 싶어했다. 고종 시대 문신 성근묵은 <효경부전(孝經附傳)>을 썼고, 문인 최성환은 <효경> 장구(章句) 아래 경서와 사서의 중요한 말과 옛사람들의 훌륭한 행실에 대한 글을 첨부해 <효경대의(孝經大義)>를 편찬했다. 주목할 만한 점은 한국 최초의 근대식 민간 인쇄소인 광인사가 처음으로 간행한 것이 <충효경집주합벽(忠孝經集註合璧)>이었다는 것이다. 이로써 근대까지 <효경>이 여전히 매력을 잃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은 <효경>을 읽는 한국인은 적지만 <효경>에 내포된 ‘효’ 사상은 여전히 한국인 사이에 널리 퍼져 있다.   


글|위셴룽(喻顯龍), 상하이(上海)외국어대학 글로벌문명사연구소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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