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秦漢과 로마로 보는 동서양의 가치관


2023-02-23      

중국의 근대 역사가인 뤼쓰몐(呂思勉)은 “진한 시대는 고금(古今)의 전환의 관건이다”라고 했다. 전환을 칭찬하는 자는 ‘봉건제에서 군현제로의 진보’라고 했고, 폄하하는 자는 ‘동양 전제주의의 시작’이라고 했다. 진한과 로마라는 동서양 문명은 서로를 비추고, 동서양 가치관의 탄생과 성장은 문명 발전의 일반적인 법칙에 부합할 뿐 아니라 그들의 객관적인 환경과 역사 조건이 달라 각각 다른 특징을 지닌다.


‘동양 전제’에서 중국에 대한 오해까지

‘동양 전제주의’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정의한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였다. 군주는 주인이 노예 대하듯 백성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무한 권력을 지니고 어떠한 법률도 준수할 필요가 없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당시 그리스 로마의 눈에 비친 동양은 이집트와 페르시아에 불과했다. 중세 유럽의 눈에 비친 동양은 몽골과 제정 러시아뿐으로 ‘동양의 동쪽’이었던 중국에 대한 인식은 전혀 없었다.


유럽이 처음으로 중국을 알게 된 것은 명청 시대 중국을 방문한 선교사들이 가져온 정보를 통해서였고 이때 잠시 ‘중국 붐’이 일었다. 베르사이유 궁전 무도회에서 프랑스 국왕이 중국식 복장을 입었고, 센강 강가에서 그림자극이 공연됐으며, 숙녀들은 금붕어를 키우고 여성들은 가마를 타고 다녔다.


이런 현상은 대가들의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하나는 볼테르를 필두로 한 ‘숭화파(崇華派)’다. ‘중국을 참고해 제도를 개혁’하려고 한 볼테르는 자신의 서재를 ‘공묘(孔廟)’라고 했고 자신의 필명을 ‘공묘 대주지’이라고 했다. 라이프니츠는 중국의 ‘과거제’가 플라톤의 ‘철인왕의 통치’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케네는 “중국의 제도는 현명하고 확고부동한 법률 위에 구축됐고 황제도 신중하게 이를 준수한다”고 생각했다.


다른 하나는 몽테스키외를 필두로 한 ‘폄화파(貶華派)’로 중국을 빗대어 반대파 왕의 ‘절대 왕권’을 반대하기 위해 중국을 동양 전제의 전형이라고 봤다. 군주 통치를 서양은 ‘군주제(monarchy)’라고 할 수 있지만 중국은 ‘전제(despotism)’라고만 할 수 있다고 했다. 유럽의 군주제는 귀족과 교회의 견제가 있지만 중국은 없기 때문이다. 그는 중국의 군주를 견제하는 방대한 규모의 문관체계(황권과 사대부가 천하를 함께 다스린다)를 이해하지 못했고 재상 권력으로 통치를 분산하고, 황제의 명령을 심사하며, 사관의 감독과 언관의 간언 등 제도를 이해하지 못했다.


문관제도와 기층정권은 중국과 서양 국가 통치 체계에 있어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다. 또한 몽테스키외는 중국과 타타르제국을 ‘동양의 전제’라고 싸잡아 비판했다. 그는 서양의 군주 폭정이라도 ‘동양의 전제’보다 훨씬 낫다고 말했다.


이후 헤겔은 역사가 동양에서 시작해 서양에서 끝난다는 역사관을 제기하고 동양은 원래 낙후되고 정체되며 노예적이지만, 서양은 원래 진보적이고 자유롭고 문명적이라고 주장했다. 중국을 평가한 대가들은 선교사들에게서 근거 없는 말을 들었을 뿐이었고, 단 한 명도 중국에 가본 적이 없었고, 중국어를 아는 사람도 없었으며, 중국 역사를 연구해본 사람도 없었고, 심지어 ‘동양 문명’이 몇 가지인지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동양 전제’라는 맥락을 제외하고도 대가들의 중국에 대한 오판은 많았다. 예를 들어 막스 베버는 중국은 ‘가산 관료제(家產官僚製)’라며 관료는 모두 군주의 가신이고, 중국은 통일된 재정 체계가 없으며, 공부를 해 과거시험을 보고 관직에 나서는 것은 ‘관직 봉록’에 대한 투자로 ‘세금 징수 청부인’이 되어 상부에 납세하고 난 돈을 자기 주머니에 채우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 한나라 때부터 재정은 국가 재정(대사농(大司農))과 황실 재정(소부(少府))으로 나뉘었고, 황제는 사적인 돈으로 관료의 봉록을 지급할 필요가 없었으며, 관료도 황제의 가신이 아니었다. 진나라 때부터 징세는 현(縣)과 향(鄉)의 기층 세무원이 징수했고 ‘세금 징수 청부인’은 대통일 왕조 시대부터 존재한 적이 없었다. 막스 베버가 말한 것은 로마 황제와 가신, 군대, 세금 징수 청부인의 관계이다.


이런 오판에 대해 중국의 역사가들은 어쩔 수가 없었다. 서양은 중국의 말을 경청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백 년 동안 진행된 현대화는 서양을 중심으로 진행됐고 중국은 늘 개조와 교육의 가장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서양이 중국에 관심을 보이는 것은 그저 중국이 산업화에 성공했기 때문에 한번 돌아보는 것에 불과하다.


진한과 로마 문명의 가치

진한과 로마, 다른 길을 걸었던 두 문명에는 각각 절정과 바닥이 있다. 우리는 다른 이의 절정으로 자신의 바닥을 비교할 필요도, 자신의 절정으로 다른 이의 바닥을 비교할 필요도 없다. 우리는 절정에서 서로의 장점을 파악하고 바닥에서 서로의 결점을 파악해 각자 개선의 길을 찾아야 한다. 중국의 역사는 완벽하지 않다. 완벽했으면 근대에 참패를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중화 문명은 여전히 전환과 업그레이드가 필요하며 그래야 시대와 함께 발전하는 능력을 구현할 수 있다.


로마의 독특한 가치는 유한한 충돌이 활력을 창조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로마 역사학자인 린토트는 “이 사회는 가장 능력 있는 공민이 드넓은 공간에서 자아를 실현하고 위대해지는 것을 허락한다. 이 사회가 용납하는 것은 한계 안에서 활력 있는 충돌은 창조력을 지닌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로마의 잘못은 충돌에 있는 게 아니라 충돌이 한계를 잃었고 ‘일체(一體)’로 조절하지 못해 결국 대 분열을 초래했다는 점이다. ‘충돌 정치’는 단결에 외적이 필요하다. 서양 역사학자들은 로마의 정치제도는 일단 외적을 물리친 후 누구도 따라잡을 수 없는 우위와 통치 지위에 오르면 균형을 이루는 요소들이 반드시 지켜야할 ‘한계’를 넘어 파열되기 시작한다고 생각했다. 로마의 쇠락은 카르타고를 격파하고 맹주가 된 뒤부터 시작됐다.

전한과 후한의 독특한 가치는 일체와 다원의 병존에 있다. 일체는 단결을 보장하고 다원은 활력을 보장한다. 일체와 다원이 동시에 유지되기는 어렵다. 일체가 다원을 완전히 압도하면 경직되기 시작한다. 다원이 일제를 완전히 압도하면 분열이 시작된다. 진나라는 ‘법가가 모든 것을 압도’했기 때문에 망했고, 서한은 ‘유가가 모든 것을 압도’했기 때문에 망했으며, 동한은 상하층이 동시에 분열해서 망했다. 어떻게 ‘일체’와 ‘다원’을 동시에 관리하느냐가 중국 정치의 영원한 과제다.


실제 세계에서는 제도 자체만 갖고 성공한 정치제도는 없다. 제도의 좋고 나쁨 여부는 그것을 운용하는 사람에게 달려 있다.따라서 제도의 생명력은 근본 가치관을 수호하면서 결함을 보충할 수 있는 사람을 계속 배출할 수 있느냐 여부에 달려 있다. 오늘날, 제도의 진정한 생명력은 세계의 다원화를 포용하면서 자신의 일체를 유지할 수 있는 청년 세대를 배출할 수 있느냐 여부에 있다.


중국은 유일한 고대 문명이 아니고 다른 고대 문명도 ‘현대화’와 ‘자신을 재조명’하는 어려움에 처해 있다. 그러나 그들은 반드시 현대화를 이룰 것이고 현대화에 가려진 오래된 가치를 드러내기 시작할 것이다. 중국이 서양과 문명의 대화를 완성한다면 모든 고대 문명이 서로 융합하고 서로를 참고하는 데 지름길을 열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판웨의 <진·한과 로마(秦漢與羅馬)>에서 발췌한 것이다.


글|판웨(潘岳), 역사학 박사이고 중국공산당중앙위원회통일전선사업부(中央統戰部) 부부장, 중국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주임·당조(黨組) 서기이며, 중국공산당 제20기 중앙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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