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15
9월~10월은 게의 제철이다. 오늘은 중국과 한국의 게 식문화와 그 역사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과거 중국의 게 식문화
중국에서 게를 네 가지 명칭으로 부른다. 방해(螃蟹), 곽삭(郭索), 개사(介士), 무장(無腸)이다. ‘방해’는 옆으로 비스듬히 걷는 게의 모습을 형용한 말이다. ‘곽삭’은 게가 옆으로 기어가는 소리를 표현한 것이고 ‘개사’는 갑옷을 입은 무사처럼 딱딱한 게의 껍데기를 뜻한다. ‘무장’은 창자가 없는 게의 특징을 가리킨다. 이렇듯 다양한 명칭은 고대 중국인들에게 게가 얼마나 친숙하고 애중한 존재였는지 보여준다.
동한의 <동명기(洞冥記)>에도 한(漢) 무제(武帝) 때 서역국 중 하나인 선원국(善苑國)이 공물로 바쳤던 게 맛이 일품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한 무제는 중국 역사상 최초로 게를 맛본 인물인 셈이다.
특히 중국의 강남(江南, 창장·長江 이남) 사람들은 게 요리를 좋아했다. 고고학적 발견에 따르면 저장(浙江) 자싱(嘉興)의 신석기 문화 유적인 마자방(馬家浜)에 지금으로부터 약 6천년 전 게를 먹었던 역사적 흔적이 남아 있다. <세설신어(世說新語)>에 따르면 동진(東晉)때 자유분방한 성격의 관료 필탁(畢卓)이 사람들에게 “한 손으로 술잔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게 집게발을 쥔 채 이대로 평생을 살아도 만족한다”고 말했다는 기록이 있다. 수(隋)나라가 중원을 통일한 이후 남조(南朝)의 게 식문화는 점차 중원으로 전파됐다. 수 양제(煬帝)도 강남에 남하할 당시 풍성하고 성대한 게 요리를 즐겼다.
당(唐)나라에 이르러 게를 즐겨 먹는 문화는 문인들 사이에서도 유행했다. 이백(李白)은 술지게미(醪糟)에 절인 게인 ‘조해(糟蟹)’를 좋아했고, 시인 피일휴(皮日休)는 쑤저우(蘇州)에서 벼슬할 당시 게를 즐겨 먹으며 친구인 육구몽(陸龜蒙)에게 게를 선물하기도 했다. 육구몽은 <해지(蟹志)>에서 게의 습성과 특징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5대 10국(五代時期)시기 오(吳)나라와 월(越)나라에는 게를 전문적으로 포획하는 어민인 ‘해호(蟹戶)’가 생겨났고, 북송 시기에는 게를 전문적으로 거래하는 상인인 ‘해행(蟹行)’도 등장했다.
<동경몽화록(東京夢華錄)>에 따르면 북송(北宋) 시대 유행한 수많은 게 요리법 가운데 가장 간단한 것은 궁중요리로도 진상한 ‘세수해(洗手蟹)’였다. 세수해는 싱싱한 게를 잘게 조각내 소금과 매실, 귤, 생강, 맛술 등으로 간을 한 뒤 빠르게 절여 만드는 요리다. 조리 방법이 간단해 ‘손님이 손을 씻고(洗手) 오면 곧바로 자리에 앉아 먹을 수 있다’고 해서 세수해라는 이름이 붙었다.
송나라 때부터 게는 일종의 ‘학문’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북송 시기 부굉(傅肱)의 <해보(蟹譜)>에는 게에 대한 역사적 기록과 함께 게와 관련된 문화나 견문(見聞) 등이 수록돼 있다. 남송의 고사손(高似孫)이 쓴 <해략(蟹略)>에는 게에 대한 지식이 더욱 상세하게 기술돼 있어 ‘게 백과사전’으로 불릴 만큼 전문적 학술서의 성격을 띠고 있다.
명·청(明清) 시대 들어서는 사람들이 게찜을 선호했다. 게를 찌는 것이 본연의 신선한 맛을 더 잘 살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청나라 소설 <홍루몽(紅樓夢)>에도 ‘방해 연회’가 언급되지만 여기서는 정찬(正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중국식 전통 ‘애프터눈 티(Afternoon tea, 오후에 차와 다과를 곁들인 가벼운 식사)’를 말한다. 청나라 요리서 <조정집(調鼎集)>에는 47가지에 이르는 게 요리법이 수록돼 있어 중국에서 게를 즐기는 문화가 이미 오래전부터 광범위하고 깊게 퍼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과거 한국의 게 식문화
<성호사설(星湖僿說)>에 따르면 조선반도(한반도) 지역 주변에 많은 게가 서식하고 저자인 이익(李瀷)도 10여 종의 게를 직접 목격했다고 한다. 백성들은 자주 게장을 담가 먹는다고 기록돼 있다. 북송 서긍(徐兢)은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서 고려 백성들이 자주 먹는 해산물 중 자해도 포함돼 있고 양반들을 제외하면 일반 백성들은 돼지나 양고기를 잘 먹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고려 예종은 수도 개경에서 신하들과 함께 경치를 감상하며 시를 짓곤 했는데 그 시문 중에 “먼 사주(沙洲) 가장자리에 점점이 보이는 ‘해화(蟹火)’”라는 구절이 있다. 해화란 어부들이 밤에 게를 잡을 때 밝히는 불빛을 말한다. 이를 통해 고려 백성들의 게에 대한 수요를 짐작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조정은 지방에서 공납해야 하는 게의 수량을 상세히 규정했다. <육전조례(六典條例)>에 의하면 임금에게 바치는 바닷게가 무려 5000마리에 달했는데 게 1마리당 가격이 쌀 1.5kg과 맞먹을 정도로 비쌌다. 또 세상을 떠난 선조들이 싱싱하고 맛있는 게를 맛보길 바랐던 임금의 뜻에 따라 게가 제철인 음력 8월에는 종묘에 올리는 제상에 반드시 게가 포함되도록 했다.
여러 시문에서 게 먹는 것을 정말 좋아했다는 기록이 남겨져 있다. 조선 초기의 문신 성간(成侃)은 시를 통해 게알과 해고(蟹膏, 수게의 생식소)를 두고 그 맛이 꿀처럼 달콤하고 풍미가 놀랍도록 향긋하다며 찬양했다. 문신 권우(權遇)는 친구로부터 자해 선물을 받고 매우 기뻐했다. 선물로 받은 게는 마침 중양절(重陽節, 음력 9월 9일) 명절 요리로도 손색이 없어 이를 안주 삼아 술을 마실 때 얼마나 기분이 좋을지 기대가 됐기 때문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 양경우(梁慶遇)는 게를 친구에게 선물하며 시를 통해 “이처럼 절묘한 맛을 나눌 수 있는 이는 오로지 지기(知己)뿐”이라고 표현했다. 문인 이안눌(李安訥)은 타지에서 친구가 보내 온 게 23마리를 받고 감동 받아 “이 게에는 만금(萬金)보다도 귀한 친구의 진심이 담겨 있다”고 말했다.
조선 후기 문신 조면호(趙冕鎬)는 게를 몹시 좋아했던 까닭에 종종 거액을 들여 게를 사 먹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는 게의 인기가 워낙 높아 일부 관리들이 어부나 상인들에게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강제로 게를 요구하기도 했다. 문신 이서우(李瑞雨)는 게살을 잘게 다져 풋고추와 버무린 뒤 메주로 담근 장에 절여 먹으면 더 깊은 맛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문신 홍주국(洪柱國)은 “자해 요리야말로 아무나 먹을 수 없는 진미 중의 진미”라고 말했다.
중국과 한국의 오랜 역사와 문화에 비춰 볼 때 게를 먹는 문화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가히 ‘우주처럼 광대한 세계’라 할 수 있다. 우리는 미각을 통해 이러한 문화의 다채로움과 개성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 중국으로 여행을 온다면 강남 지역의 털게찜(淸蒸大閘蟹), 맛술을 넣은 숙취해(熟醉蟹), 십팔참, 쓰촨(四川)의 얼얼한 향라해(香辣蟹), 후난(湖南)의 구미해(口味蟹), 광둥(廣東)의 유민해(油燜蟹), 푸젠(福建)의 계화해(桂花蟹) 등을 추천한다. 게알을 곁들인 밥, 두부, 국수, 만두 등은 부드럽고 고소한 맛이 일품이므로 꼭 먹어 보기를 권한다. 한국을 여행한다면 필자가 제일 먼저 추천하고 싶은 것은 양념게장과 꽃게찜이다. 양념게장은 신선한 게살과 맵고 짠맛이 강한 양념이 잘 어우러져 쌀밥을 절로 부르는 ‘밥도둑’이다. 꽃게찜은 매콤한 향이 구미를 강하게 돋우고 다양한 맛의 차원을 느낄 수 있다. 창원이나 마산, 부산 등 일대에서 유명하다. 조선 후기의 학자 윤추(尹推)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꽃게찜을 보고 젊고 건강했던 시절 마음놓고 먹고 마시던 아름다운 추억이 떠올라 세월의 무상함을 한탄하기도 했다. 하지만 달리 보면 이 일화는 다음과 같은 교훈도 일깨워 준다. “현재를 소중히 여겨라. 세상에는 결코 낭비하지 말아야 할 두 가지가 있다. 바로 음식과 시간이다.”
글|위셴룽(喻顯龍), 상하이(上海)외국어대학 글로벌문명사연구소 전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