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15
중국은 농업 대국이다. 가을은 농민들에게 가장 바쁜 시기이자 풍성한 수확의 계절이기도 하다. 광활하고 풍요로운 중국 땅에서 사람들은 강수량과 기온, 토양 등의 자연 조건에 따라 남쪽에서는 벼농사, 북쪽에서는 밀농사를 짓는 농업 구도를 형성했다. 가을이 되면 들판은 황금빛으로 물든다. 옥수수와 땅콩, 대두, 수수 등이 ‘가을의 화가’가 돼 풍성한 결실로 가득한 가을을 장식한다. 중국에는 ‘오곡풍등(五谷豐登)’이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풍성한 가을걷이의 정경을 묘사하는 이 말은 풍작과 물질적 풍요, 사회의 화합과 복을 비는 염원을 상징한다. 여기에는 전통 농경사회에서 한 해의 풍년과 행복한 삶을 꿈꾸는 농민들의 기대와 희망이 담겨 있다.
고사성어의 유래와 전설
‘오곡풍등’은 <육도·용도·입장(六韜·龍韜·立將)>에 등장하는 ‘절기에 맞는 비와 바람으로 오곡이 풍등하고 나라가 평안하다(是故風雨時節, 五谷豐登, 社稷安寧)’라는 구절에서 유래됐다. 현재 우리가 흔히 아는 ‘오곡(五谷)’은 벼·보리·콩·조·기장이다. 과거에는 마·보리·콩·조·기장을 가리켰다는 설도 있다. 둘 중 다른 것은 ‘벼’와 ‘마’뿐이다. 과거 중국의 경제·문화 중심지는 북방의 황하 유역이었다. 당시 북방의 주요 작물은 마였고 남방의 주요 산물은 벼였기 때문에 고서에 나온 오곡에 대해 각기 다른 해석이 존재한다. <여씨춘추(呂氏春秋)>에서는 두 가지 설명을 종합해 6가지 작물을 기록했다. 하지만 마는 유일하게 농사가 아닌 방직물을 통해 얻어지는 곡물이므로 벼를 으뜸으로 두는 전자의 정의가 현대인이 생각하는 오곡의 관점에 더 부합한다. 게다가 오늘날 사람들이 말하는 오곡은 더 이상 ‘다섯 가지 곡식’에 한정되지 않고 곡류 전체를 통칭하는 말이 됐다. ‘오(5)’는 많은 종류의 곡물을 의미할 뿐 정확한 개수를 뜻하지 않는다.
오곡에 대해서는 또 다른 전설이 있다. 상고 시대 신농씨(神農氏, 중국 상고시대 부락의 우두머리)가 등장하기 전 사람들은 주로 수렵과 채집에 의존해 생활했다. 신농 시대에 이르러 인구가 점점 불어났고 채집할 수 있는 식물의 열매나 사냥할 수 있는 새와 짐승이 한정돼 있어 인간의 배고픔을 채우기에 충분치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신농씨가 길을 걷던 중 작고 푸릇푸릇한 묘목 몇 그루를 발견했다. 묘목 주위의 흙을 털어내고 조심스레 살펴보니 뿌리 부분에 아직 다 썩지 않은 열매 껍질이 남아 있었다. 신농씨가 좀 더 길을 가보니 또 다른 묘목들이 있었다. 그중 한 무더기의 묘목 꼭대기에 특이하게도 열매 같은 것이 매달려 있었다. 신농씨는 이 묘목들이 초목에 맺힌 열매가 변한 것이라 생각했고 묘목이 다 자라면 다시 열매가 열릴 것이라 생각했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면 인간은 먹을 것이 무궁무진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산과 계곡은 풀과 나무로 가득 차 있었고 이 중에서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을 골라내는 것이 관건이었다. 신농씨는 산골짜기를 이곳저곳 누비며 천 가지 풀과 백 가지 꽃을 직접 맛봤다. 여러 해 고생 끝에 신농씨는 마침내 약으로 쓰거나 음식으로 먹을 수 있는 오곡들을 가려내 사람들로 하여금 농사를 짓게 하였다. 이것이 바로 ‘신농상백초 예오곡(神農嘗百草 藝五谷, 신농씨가 백 가지 풀을 맛보고 오곡을 심다)’의 기원이다.
추수와 농민들의 삶
대지가 광활한 중국에서는 남방과 북방의 농업 형태가 각기 다르게 발전해 왔다. 북방에서 일모작 농사의 추수철에 들어설 무렵 남방은 이미 한 차례 수확을 끝내고 다음 파종을 시작한다. 남방은 북방에 비해 기후가 습하고 강수량이 풍부해 농작물 생장에 적합한 환경이기 때문에 이모작에서 삼모작까지도 가능하다. 반면 북방은 상대적으로 기후가 건조하고 강수량이 적어 대부분 지역에서 한 해에 한 번 농사를 짓는 일모작을 한다.
필자의 고향인 화베이(華北)평원 일대의 농민들은 봄에 파종하고 가을에 수확하는 오래된 풍습을 유지하고 있다. 이들은 북방 땅에서 묵묵히 경작을 이어가며 주로 밀과 옥수수, 고구마 등을 재배한다. 음력 8월이 되면 본격적인 수확철에 돌입한다. 농사일은 고단하지만 농민들은 이를 마땅한 자신의 책임이자 생계 유지의 수단으로 여긴다. 그들은 오랜 세월 한결같이 옥수수를 따고 고구마를 캐고 콩을 단으로 묶는다. 그리고 들판에서 난 곡식들을 수레에 실어 자신의 집 곳간에 쌓아둬야 비로소 바쁜 하루의 끝을 맺는다.
추수철은 한 해 중 가장 바쁜 시기이다. 평원에서는 주로 농기계를 이용해 수확하지만 타이항(太行) 산간 지대의 수확에는 일손이 필요하다. 옥수수 수확철이 되면 부모님은 아침 일찍 밭으로 나가 옥수수 줄기를 한 줄씩 베어 쓰러뜨렸다. 외삼촌, 외숙모, 고모부, 고모 등 집안 가족들도 총출동해 일손을 거들었다. 중국 인류학자 페이샤오퉁(費孝通) 선생은 저서 <향토중국(鄉土中國)>에서 “땅은 농민들의 근본”이라고 말했다. 맞는 말이다. 인류는 이 땅에 오곡을 심고 길러낸 덕분에 자손 대대로 번성할 수 있었다.
오곡은 앞서 언급한 ‘오곡풍등’은 물론 ‘풍조우순(風調雨順, 비와 바람이 농사에 알맞게 온다)’, ‘국태민안(國泰民安,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이 안락하다)’ 등과도 자주 사용되는 아름다운 말이다. 그렇다. 농사에 적절한 기후가 조성돼야 농작물이 쑥쑥 자라고 백성들의 생활이 안정되며 나라도 비로소 부강해진다. 매년 추분(秋分)은 중국 정부가 농민들을 위해 국가적 차원에서 특별히 제정한 ‘중국 농민 풍년절(中國農民豐收節)’이다. 이날 농민들은 한 해의 수확을 축하하며 일 년 동안의 노고를 눈앞의 결실로 바꿔 놓는다. 오늘날 중국 사회에는 농작물을 소중히 여기고 농민들의 수고와 결실을 높이 평가하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예로부터 중시되던 ‘민이식위천(民以食為天, 백성은 먹을 것을 하늘로 여긴다)’ 정신에도 변함이 없다. 오곡풍등은 풍년을 기원하는 아름다운 축원이자 소망이다. 노동을 통해 결실을 맺고 수확의 기쁨을 누리는 일은 앞으로도 이곳 화하(華夏, 중국의 별칭) 대지에서 끊임없이 반복되고 더욱 번성할 것이다.
글|칭산(靑山) 사진|인공지능(AI) 생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