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15
우이산에서 나는 홍차 가운데 최상위 등급인 정산소종
가을이 농익어 가는 11월이 되면 슬슬 홍차(紅茶)가 생각난다. 카페인에 예민해 홍차를 즐겨 마시지는 않지만, 한 해가 저물어 가는 이 때가 오면 정산소종(正山小種)을 꺼내지 않을 수 없다. 오룡차(烏龍茶)보다 더 진하고 자극적인 맛은 겨울을 준비하는 11월과 가장 잘 어울린다. 짧디짧은 가을을 아쉬워하며 가을의 끝자락을 놓치고 싶지 않은 심정을 대변한다고 할까. 고급 시가 향 같기도 하고 스모키한 하몽 내음 같기도 한 정산소종 한 잔이면 가을을 떠나보낼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다.
간혹 차를 마시다 보면 홍차가 영국에서 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종종 만난다. 그런데 홍차의 본고장은 푸젠(福建)성 우이산(武夷山)이다.
홍차 영국 기원설은 나름 과학적인 근거가 있다. 중국 동남부에서 나는 녹차(綠茶)와 오룡차를 배로 실어 유럽으로 가져가면 오랜 항해로 자연 발효가 돼 홍차가 됐다는 그럴싸한 ‘썰’이다. 이 이야기는 장기간 항해를 위해 와인에 주정을 넣어 강화시켰다는 포트와인의 기원과 맞물려 상당히 신뢰를 얻기도 했다. 언뜻 들으면 그럴싸해 보이지만 제다(製茶) 과정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녹차와 오룡차가 홍차가 된다는 말에 헛웃음이 날 것이다. 녹차와 오룡차가 홍차에 비해 산화 발효가 덜 된 차라서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배에 실어 가는 동안 자연스럽게 발효도가 높아질 정도로 제다가 단순한 것은 아니다.
오룡차는 요청(搖靑, 찻잎을 흔들어 산화 발효를 돕는 과정)을 거치는데 발효 정도는 60~70%가량이다. 홍차는 찻잎의 습도를 유지하면서 완전히 발효시켜 발효도가 95%에 달한다. 오룡차는 찻잎이 적절히 발효됐을 때 발효를 정지시키고 건조한다. 그래서 반(半)발효차라고 한다. 반면 홍차는 완전 발효를 시키는 점이 오룡차와는 다르다. 당연하게도 홍차의 기원이 영국이라는 낭설은 이미 아주 오래전부터 홍차가 있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깨졌다.
첫 맛은 달고 끝으로 갈수록 코를 자극하는 스모키한 향이 매력적인 정산소종
우이산에서 나는 홍차 가운데 최상위 등급의 차는 정산소종이다. 정산소종은 스모키한 향이 특징인데, 첫맛이 달콤하면서도 중반 이후 끝까지 코를 자극하는 자욱한 스모키한 향이 이어진다. 바로 이 점이 매력이다. 위스키로 따지면 피트 향이 매력적인 라프로익의 그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무거우면서도 화사함이 곁들여진 정산소종은 홍차 마니아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좋다.
“오오, 차에서 스모키한 향이 나다니요!” 하며 감탄할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정산소종은 훈연을 해 향을 입히기 때문에 말 그대로 스모키한 향이 난다. 정산소종은 흰 소나무(白松)를 태워 찻잎을 열건조한다. 그래서 강한 훈연향이 배인다. 한약재 향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혹자는 고급 시가와 담뱃잎의 향을 정산소종의 향과 비교하는데 나는 흡연자가 아니라 정확히는 모르겠다.
독특한 향이 특징인 정산소종은 우유나 설탕을 타서 마시지 않고 차 그대로를 즐겨야 한다. 한국 전남 흑산도에서 홍어를 삭혀서 먹지 않고 생으로 즐기는 것처럼 말이다.
정산소종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조금 재밌는 설은 다음과 같다. 17세기 초 정산소종의 본고장인 푸젠성 우이산 싱춘전(星村鎮) 퉁무춘(桐木村)에 군사들이 쳐들어와 차를 만들던 사람들이 피난을 간 적이 있다고 한다. 시간이 지나 군사들이 물러가고 마을 사람들이 다시 돌아왔을 때 차는 완전히 발효된 상태였다. 마을 사람들은 이를 버리기가 아까워 이 고장에서 나는 소나무를 태워 차를 건조했고 이것이 정산소종의 기원이 됐다고 한다.
또 다른 설은 1840년 아편전쟁 이후 중국 내 정국이 혼란하자 제다 기술의 궁극으로 불리는 오룡차의 생산이 급감했다고 한다. 그러자 시장에는 가짜 오룡차가 나돌았고, 이에 영국차 시장에서는 가짜가 판치는 오룡차 대신 충분히 산화 발효된 홍차 수요가 집중됐다. 시장의 수요에 맞춰 완전히 발효된 차를 소나무를 이용해 태워 중국 특유의 열건조 과정을 거쳐 만들었는데 이게 정산소종 홍차가 만들어진 기원이라고도 한다. 다만 두 가지 설 모두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알 길이 없다.
정산소종은 영국의 고급 식품 매장인 포트넘앤메이슨(Fortnum&Mason) 등 여러 홍차 회사의 블렌딩에 표준으로 쓰인다. 사실 TWG나 포트넘앤메이슨 같은 가향차를 만드는 브랜드들은 정산소종이나 치먼(祁門) 등 원조 홍차를 모방한 차를 만들고 있다. 원조 홍차의 원가가 워낙 비싸기도 하지만 과거 영국에서 홍차가 귀한 대접을 받을 때 가향차로 아쉬움을 달랬던 것이 현재는 하나의 장르가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정산소종은 여러 홍차 회사의 블렌딩에 표준으로 쓰인다.
정산소종과 연이 있는 또 다른 차를 소개할까 한다. 정산소종은 몰라도 얼 그레이(Earl Grey)를 아는 사람은 많다. 얼 그레이를 만든 사람은 19세기 영국 총리를 역임한 찰스 그레이 백작이다. 그는 정산소종의 맛에 매료돼 1706년 설립된 홍차 명가인 트와이닝스(Twinings)에 정산소종과 같은 맛의 홍차를 주문했다. 정산소종은 향이 쉽게 날아가 유통에 어려움을 겪었고, 트와이닝스는 정산소종 특유의 향을 모방하고자 비슷한 향이 나는 베르가모트 오일(bergamot oil)을 중국 홍차에 첨가했다고 한다. 이것이 그 유명한 얼 그레이가 탄생한 배경이다. 정산소종의 일종인 진쥔메이(金駿眉), 인쥔메이(銀駿眉)는 실제로 베르가모트 오일과 비슷한 향이 나는데 이를 ‘귤 향’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정산소종의 향은 실제로 차에서 나는 것이지 특정 향을 첨가하는 레시피를 통해 구현한 것이 아니기에 매우 귀하다. 두 가지를 모두 즐겨 마시는 입장에서 정산소종과 얼 그레이는 완전히 다른 차라고 할 만큼 상이한 맛과 향을 지녔다. 가격도 정산소종이 훨씬 비싸다. 정산소종과 얼 그레이는 이제 전혀 다른 영역에서 마니아 층을 형성하고 있어 얼 그레이의 기원은 하나의 이야기로써만 의미가 있다.
정산소종에도 여러 등급이 있기 때문에 호텔에서 무료로 제공되는 정산소종을 마셨다고 그 차가 여기에서 말하는 정산소종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고급 정산소종의 경우 매우 귀하며 50g 기준 20만 원을 호가한다. 더 비싼 정산소종도 많다. 특히 우이산에서 나는 정산소종은 아주 소량이라서 우리가 마시는 차가 진품일 가능성은 적다. 그러니 적정한 가격의 정산소종을 구매해 마시는 편이 경제적으로나 맛으로나 훨씬 좋다.
11월의 어느 늦은 가을 밤, 정산소종 한 잔에 밤 양갱을 다식으로 곁들여 본다. 진한 홍차 향 사이로 양갱의 단맛이 끼어 든다. 인생이 이랬으면 좋겠다. 차처럼 그윽하고 양갱처럼 달았으면 좋겠다.
훗날 나이가 더 들면 오늘처럼 정산소종을 마시며 지나간 가을을 그리워하고 있을까? 아니면 다른 차를 마시며 다가올 만추의 어느 밤을 기대하고 있을까? 같은 차를 마시고 있어도 다른 차를 마시고 있어도 그것 또한 내 인생이겠지. 지금 내 앞에 놓인 정산소종을 즐기는 것이 지금 내게는 최선의 인생이다. 가을이 깊어가는 소리가 깊다. 가을이 빠져나가는 뒷모습이 재빠르다.
글| 김진방(한국)
사진| 인공지능(AI) 생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