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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위오두미절요(不爲五斗米折腰)


2022-12-27      



도연명(陶淵明)은 중국의 전통 사대부가 존경하는 대상 중 한 명이다. 두보(杜甫)와 소식(蘇軾) 등도 이 은자를 격찬했다. 도연명이 칭송받는 이유 중 하나는 봉록을 위해 절개를 굽히지 않고 관직에서 물러나 은거했기 때문이다. 그는 명리를 추구하지 않고 가난한 삶을 선택했으며 창작을 즐거움으로 삼았다. 이런 기개 있는 정신은 칭송할 만하다.


‘불위오두미절요’의 기원

오두미는 봉록의 다른 말이고, 절요는 허리를 굽히고 읍한다는 뜻이다. 쌀 다섯 말의 봉급을 받겠다고 권력자에게 굴복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이후 고결하고 절개가 있어 이익과 봉록을 위해 움직이지 않음을 비유하는 말로 사용하게 됐다.


이 성어는 <진서·도잠전(晉書·陶潛傳)(陶潛, 도연명)>에서 나왔다. 도연명은 어릴 때부터 박학다식해 현지에서 유명했다. 이후 여러 차례 관직에 올랐다. 지방 국자감의 주관관을 지냈고 군대에서 문관을 지냈지만 공명에 욕심이 없고 이익에 급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금세 사직하고 은거와 관직을 되풀이하는 생활을 했다. 도연명의 마지막 관직은 팽택현 현령으로 의희(義熙) 원년(405년) 그의 나이 41세였다. 재직한 지 80여 일이 되던 날, 심양군에서 독우(督郵)를 파견해 시찰했다. 시찰 나온 독우 류운(劉雲)은 성격이 거칠고 오만하며 악랄하고 탐욕스럽기로 유명했다. 그는 태수의 신임을 믿고 세도를 부렸다. 해마다 순시를 명목으로 뇌물을 요구했고 따르지 않으면 죄를 뒤집어씌워 모함했다. 현의 하급관리가 이 소식을 듣고 의관을 단정히 하고 선물을 준비해 공손하게 그를 맞으러 갔다. 이에 도연명은 “어찌 오두미의 봉록을 위해 굽실거리고 절개를 꺾으며 소인에게 뇌물을 준단 말인가”라며 탄식했다. 그리고 인수(印綬)를 풀고 사직서를 써 하급관리에게 건넨 다음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관원이 도연명을 몇 차례 찾아와 산에서 나올 것을 요청했으나 도연명은 병을 핑계로 만나지 않았고 다시는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도연명은 책을 읽고 창작을 하고, 술을 마시며 시를 쓰고, 거문고를 연주하고 휘파람을 불었으며, 직접 농사를 짓고, 동쪽 울 밑에서 국화를 꺾어 들고 멀리 남산을 바라봤다.


<진서>에서 사신(史臣)은 “군자는 세상에 나와 관직을 하고 천하를 구제하며 백성을 위해 목소리를 내다가 곤궁해지면 집에서 자기를 수행해야 하는데, 도잠은 곤궁한 상황에서 태연하게 처신하고 원망하지 않으니 칭송할 만하다”고 하면서 “확호군사, 초연절속. 양수암아, 소성림곡(確乎群士, 超然絕俗. 養粹巖阿, 銷聲林曲)”이라고 했다. 속세를 초월해 산속에 은거하고 그 안에서 정신의 자양분을 얻어 도연명이 유유자적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절개 추구하고 명리 위해 허리 숙이지 않는 정신

도연명에게 인격과 절개는 생명의 중요한 부분으로 명리 때문에 그것을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오류선생전(五柳先生傳)>에서 자신의 빈곤하지만 만족스러운 상태를 묘사했다. “조용하고 말이 없으며 영화와 녹봉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책 읽는 것을 좋아하지만 글자 하나하나에 구애받지 않고, 내용을 깨달으면 식사를 잊을 정도로 기쁘다. 음주를 좋아하지만 집이 가난하여 자주 마시지 못한다. 가족과 친구가 이런 상황을 알고 술자리를 마련해 초대하면 취할 때까지 마신다. 얼큰하게 취하면 미련없이 집으로 돌아온다. 누추한 집안은 텅 비었고, 차가운 바람과 뜨거운 햇빛을 가릴 수 없으며, 조악한 옷에는 기운 자국이 가득하고, 밥 그릇과 물 바가지는 늘 비었지만 그래도 만족스럽다. 글 쓰는 것을 낙으로 삼고 글을 통해 자신의 의지를 조금 내비치면서도 득실을 따지지 않았고 이렇게 자신의 삶을 마무리했다.”


도연명의 삶의 궤적을 살펴보면 그는 적지 않은 봉록을 받고 의식주를 걱정하지 않으며 편안하게 살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인격과 절개를 대가로 치러야 했다. 존엄과 명리의 모순 앞에서 도연명은 존엄을 선택했고 스스로 욕심 없고 조용하지만 고단한 전원생활을 선택했다. 그는 독서를 좋아해 식사를 잊을 정도였다. 인격과 자존을 위해 그는 빈곤한 삶을 선택했다. 누추한 집은 비바람을 막을 수 없었고, 옷은 조악했으며, 양식도 풍족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뜻을 꺾지 않고 자신의 내면 세계를 풍부하게 하는 글을 썼다. 외부의 물질은 잃었지만 마음의 자유와 인격의 존엄을 얻었고, 수수하면서 깊이 있고 장식이 없지만 자연스러우며 후대에 길이 남은 시문을 썼다. 이는 귀중한 문학적 자산이자 귀중한 정신적 자산이다.


이상적인 삶 탐구와 현대에 주는 교훈

삶의 본질은 무엇인가? 이상적인 삶은 어떤 것인가?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도연명은 유명한 <귀거래혜사(歸去來兮辭)>를 써 자신이 생각하는 삶의 형태를 묘사했다.


조용한 곳에서 작은 집을 마련하고 주변에 소나무와 잣나무, 국화 등으로 장식한다. 가족이 함께하고 하루 종일 숲을 거닐면서 경치를 마음껏 감상한다. 시와 책, 거문고와 술로 시름을 달랜다. 직접 농사를 지어 자급자족하면서 농촌 생활을 누린다. 도연명에게 부귀와 명리는 남의 일이며 애써 추구하지 않았다. 논밭과 자연 풍광 속에서 문학 소재와 정신 역량을 흡수했고, 하늘의 뜻에 순응해 자신의 처지를 만족하고 현재를 즐기며 본심을 따랐다.


도연명이 추구한 삶은 외적인 것에 구속되지 않는 것이었다. 풍부한 물질 자원도 끊임없는 금전적 이익도 아니라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내적인 충실함과 만족감으로 자연을 탐구하고 더 나아가 세계를 인식하는 것이었다. 그의 일생은 인생의 진리 추구로 가득했고, 세속에 물들지 않았으며, 본심을 굳건하게 따라 순박함과 본성으로 돌아가 높고 심원하며 세속을 벗어난 경지에 도달했다. 금(金)나라의 대시인 원호문(元好問)은 “일어천연만고신, 호화낙진견진순(一語天然萬古新, 豪華落盡見真淳)”이라고 칭송했다. 도연명의 언어는 평범하고 자연스러우며 화려한 장식을 걷어내 순수한 아름다움이 있어 시간이 지나도 늘 새롭다는 뜻이다. 특히 ‘오두미를 위해 허리를 꺾지 않은’ 절개는 후대 사람들이 절개를 꺾고 허리를 숙이지 않고, 권세 있는 자에게 아부하지 않으며, 허영을 위해 변하지 않고, 순수하고 선량한 본성을 유지하며, 자연 속에서 정신적 양분을 흡수하고, 자기를 초월하고 더 나은 자신으로 변화하도록 격려한다.



글| 우한(吳晗), 상하이(上海) 사회과학원 문학연구소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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