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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포지교(管鮑之交)’를 통해 본 사귐의 도리


2019-10-15      

중국 문화가 처음으로 가장 번성했던 춘추전국 시대에는 유가, 법가, 도가, 묵가, 병가, 음양가(陰陽家) 등 다양한 사상가들의 ‘백가쟁명’을 통해 중국의 사상적 기틀이 마련됐다. 이 시기에 생겨난 수많은 인물과 사건들은 후대에도 계속 회자되고 있고, 현대 중국에서 널리 쓰이고 있는 사자성어도 이때 유래된 것이 많다.

중국의 춘추전국 시기는 제환공(齊桓公), 진문공(晉文公), 송양공(宋襄公), 진목공(秦穆公), 초장왕(楚莊王) 등 5개 제후국 및 군주들로 대표된다. 이 가운데 제환공을 보좌해 천하를 제패한 인물 중 한 명으로 춘추시대 최고의 재상이라 꼽히는 관중이오(管仲夷吾·‘이오’는 이름)가 있다. 관포지교라는 사자성어는 바로 관중이오와 관련된 고사에서 유래됐다.

관중과 포숙아가 나눈 우정
<사기(史記)·관안열전(管晏列傳)>에 따르면 ‘관포지교’는 춘추전국 시기 제나라에 살았던 포숙아(鮑叔牙)와 관중에 관한 이야기이다.

젊은 시절 관중은 집이 매우 가난해 어머니를 봉양해야 했다. 이를 알게 된 포숙아는 관중에게 함께 장사를 하자고 제안했고, 관중의 사정이 어려웠기 때문에 포숙아가 대부분의 밑천을 댔다. 그런데 이후 수익이 나자 관중이 포숙아보다 더 많은 돈을 가져가기 시작했다. 이를 본 포숙아의 하인들은 “주인님보다 밑천도 적게 댄 주제에 이문은 더 많이 가져가다니, 저런 경우가 어디 있냐”며 수군댔다. 하지만 포숙아는 “그런 소리는 삼가거라. 관중은 집이 가난하고 어머니도 봉양해야 하기 때문에 좀 더 가져간다고 해도 괜찮다”라며 하인들을 타일렀다.

한번은 관중과 포숙아가 함께 전쟁에 나가 적진을 공격할 때 관중은 늘 뒤에 숨기만 했다. 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관중을 “목숨을 아까워하는 겁쟁이”라며 비난했지만, 포숙아는 오히려 “관중은 죽기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모셔야 될 어머니가 있기 때문에 목숨을 아끼는 것”이라며 관중을 두둔했다.

제나라 군주가 세상을 떠나자 왕자인 저(諸), 즉 제양공(齊襄公)이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제양공이 사치스러운 생활에 빠져 나라를 돌보지 않자 반란이 일어날 것을 예감한 포숙아는 또 다른 왕자인 소백(小白)을 호위해 거(莒)나라로 피신했고, 관중은 왕자 규(糾)와 함께 노(魯)나라로 피신했다.

얼마 후 제양공이 살해당하자 왕자 규를 왕위에 올리려던 관중은 소백을 죽이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소백이 혀를 깨물어 피를 토하는 연기를 하는 바람에 관중은 소백이 죽은 것으로 착각하였다. 결국 소백은 규보다 먼저 제나라로 돌아와 왕위에 오르는데, 그가 바로 제환공이다.

제환공은 왕위에 오른 뒤 포숙아를 상경(上卿)에 봉하려 했지만, 포숙아는 관중이 자신보다 뛰어난 재상감이라며 그를 상경으로 봉해달라고 간했다. 제환공이 “관중은 나를 죽이려 한 원수이다. 그런데 어찌 그를 상경으로 봉하라 하는가!”라며 크게 화를 내자, 포숙아는 관중이 자신의 주인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런 것이라며 관중을 감쌌다.

결국 제환공은 포숙아의 말을 받아들여 관중을 상경에 봉했고, 포숙아는 스스로 관중의 부하가 되기를 자처했다. 상경이 된 관중 역시 온 힘을 다해 제환공을 보좌했다. 점점 부강해진 제나라는 춘추전국 시기 처음으로 천하를 제패했다.

훗날 관중은 이렇게 말했다. “가난하던 시절, 포숙아와 장사를 하면서 이문을 더 많이 가져갔는데도 그는 제가 욕심을 부린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한번은 포숙아에게 도움을 주다가 오히려 그를 곤경에 빠뜨렸는데, 그는 저를 어리석다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세 차례 관직에 올랐지만 군주로부터 세 차례 면직되었는데, 당시 그는 제가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 아직 시기를 만나지 못해서 그렇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왕자 규를 왕위에 올리는 데 실패하고 그의 신하인 소홀(召忽)은 왕자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던졌지만 저는 오히려 적진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포숙아는 제가 수치심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작은 일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이름을 떨쳐 천하에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기 위한 것이라는 점을 알아주었습니다. 저를 세상에 낳아준 사람은 부모님이지만 세상에서 저를 알아준 사람은 포숙아입니다.”

관중과 포숙아의 진정한 우정에서 비롯된 ‘관포지교’는 지금도 친구 간의 깊은 우정을 가리키는 의미로 널리 쓰인다. 현재 중국 산둥(山東)성 쯔보(淄博)시에 있는 관중기념관에는 관포지교의 일화를 기리는 대련(對聯)이 걸려 있다.

“친구를 사귀고 마음을 나누는 평생의 지기(知己)를 만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관중과 포숙아는 금전과 명예를 서로 양보할 만큼 지극히 순수한 우정의 본보기이다.”

‘관포지교’에 나타난 중국인들의 사교문화
관포지교는 두 인물의 이야기지만 사실상 친구를 대하는 포숙아의 태도를 부각시키는 데 핵심이 있다. 포숙아는 이해관계를 따지지 않고 미래를 내다보며 너른 마음으로 친구인 관중을 대했다. 인간의 윤리도덕에서 친구와의 관계는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중국 현실 철학을 대표하는 유가사상은 <논어(論語)>의 ‘계씨(季氏) 편’에서 친구에 관해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나를 이롭게 하는 세 가지 벗과 해롭게 하는 세 가지 벗이 있다. 정직하고 신의를 지키며 견문이 넓은 친구는 나에게 이롭다. 나의 비위를 맞추며 아첨하고 뒤에서는 비난을 서슴지 않으며 교묘하게 말을 꾸며내는 친구는 나에게 해롭다.”

이는 비단 친구 사이뿐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에서 강조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정직하다는 것을 그릇된 사심이 없고 성품이 곧다는 것을 말한다. 예로부터 정직은 훌륭한 덕목 중 하나로 꼽혔다. 그 중 당나라 태종 때의 충신 위정(魏征)이 대표적인 예다. 위정은 과거 자신이 모셨던 태자 이건성(李建成)은 물론이고, 훗날 왕위에 오른 당 태종에게도 늘 정직하고 충심 어린 마음으로 간언했다. 사료에는 위정이 여러 차례 ‘정쟁면절(廷爭面折·조정의 대신들이 모인 자리에서 황제에게 직언하여 황제의 면을 깎아내리는 것)’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당 태종은 위정의 사심 없고 공정하며 매사에 진심을 다하는 태도를 알아보고 이에 존경심을 표했다. 그리고 위정이 죽자 당 태종은 크게 슬퍼하며 그를 위해 직접 비서(碑書)를 썼다.

“구리를 거울 삼으면 옷매무새를 다듬을 수 있고, 역사를 거울 삼으면 국가의 흥망을 알 수 있으며, 사람을 거울 삼으면 자신의 잘잘못을 알 수 있다. 이 세 가지 거울로써 과오를 범하지 않는 것인데, 위정이 세상을 떠났으니 그 중에 하나의 거울을 잃었구나.”

신의를 지킨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속이지 않고 신용을 중시한다는 뜻이다. 고대에는 친구를 사귈 때 믿음과 진솔함이 없으면 세간의 손가락질을 받았다. 신의는 지금도 친구를 사귈 때 매우 중요한 기준 중 하나다. 공자는 제자 증삼(曾參)에게 “나는 날마다 ‘남을 위한 일에 최선을 다하는지, 벗과 사귀면서 신의를 지켰는지, 배운 지식을 제대로 익혔는지’ 이 세 가지를 통해 스스로를 돌아본다”고 하였다. ‘벗과 사귀면서 신의를 지켰는지’가 자신을 돌아보는 중요한 일 중 하나였던 것이다. 이밖에 사자성어 ‘일낙천금(一諾千金)’에도 약속과 신뢰를 지킨다는 뜻을 담고 있다.

옛날 진(秦)나라 말기 계포(季布)라는 자가 있었다. 계포는 자신이 한 말을 반드시 지켰기 때문에 신망이 두터웠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친구로서 깊이 신뢰했다. 그가 철저히 신용을 지킨 까닭에 마을에는 ‘황금 백 근(斤)을 얻어도 계포의 한 마디 말보다 못하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어느 날 계포는 한 고조 유방의 눈 밖에 나서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그의 친구들은 계포의 목에 거액의 현상금이 걸렸는데도 꿈쩍하지 않고 멸족(滅族)의 위험까지 감수하면서 그를 보호하려 하였다. 성실한 자세로 주변의 신뢰를 쌓았기 때문에 모두의 존경과 비호를 받았던 것이다. ‘득도다조(得道多助·도의를 쌓으면 많은 도움을 받는다)’라는 말에도 이 같은 점이 잘 드러나 있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이런 고사를 통해 중국인들이 신의라는 덕목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도 알 수 있다.

벗을 사귈 때는 재덕(才德)을 겸비한 훌륭한 인물과 교유해야 한다. 이 중 ‘정직’과 ‘신뢰’는 ‘덕’과 관련된 것이다. 그러나 ‘견문이 넓은 친구’는 ‘재’를 갖춘 친구를 말하는 것이다. 학문이 깊고 삶의 경험이 풍부한 친구는 내가 어떤 일에 주저하거나 방향을 잡지 못하고 방황할 때 훌륭한 조언자와 길잡이 역할을 해줄 수 있다.

중국 삼국시대 인물인 제갈공명(諸葛孔明), 사마휘(司馬徽), 서원직(徐元直), 방사원(龐士元)은 모두 학식이 넓은 자들로서, 서로가 교우를 쌓고 함께 배워나감으로써 ‘견문이 넓은 친구’의 좋은 예를 보여주었다.

좋은 친구를 사귀어야 나 자신도 타인의 훌륭한 성품을 배우고 올바른 길로 들어설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친구를 사귀고 교우관계를 어떻게 이어나갈 것인지는 단순히 사람을 보는 안목이나 슬기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유유상종’이라는 말처럼 친구란 나의 인격과 품성을 비추는 거울이다. 게다가 친구를 택한다는 것은 내가 어떻게 살아갈지를 결정하는 일과도 같다. 따라서 ‘관포지교’와 같은 친구를 만나고자 한다면, 스스로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공자가 말한 ‘정직’과 ‘신의’를 갖추며, ‘견문이 넓은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글|스중젠(石鐘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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