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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 간 지켜온 초심과 뚝심

2020-01-08 글|저우천량(周晨亮)

2013년, LPEC 사무실에 있는 천쥔우 원사 사진/시노펙 뤄양공정유한공사 제공

하얀 머리칼의 정정한 어르신이 아침 햇살을 가르며 북적이는 인파를 뚫고 허난(河南)성 뤄양(洛陽)시 젠(澗)하 서쪽에 위치한 시노펙 뤄양공정유한공사(中石化洛陽工程有限公司, LPEC)로 향했다.
 
“우리나라가 신시대에 진입했는데 내가 비록 나이가 많고 체력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계속 기여할 수 있다.” 복도 끝 프린트기 앞에서 자료를 인쇄하면서 이렇게 말하는 어르신의 구부정한 등으로 햇살이 가볍게 내려앉았다. “지금은 청년들의 ‘응원단원’ 역할을 하고 있다. 어제 그들이 나에게 자료를 보내왔는데 데이터 몇 개를 수정해야 했다.”
 
올해 92세의 이 ‘응원단원’은 중국과학원 원사이자 LPEC 기술위원회 명예 주임인 천쥔우다.
 
중국에서는 석유의 70%가 접촉·분해 가공을 거친다. 이 가공기술의 창시자가 바로 천쥔우다. 이 분야에서 70년 동안 일한 그는 올해 92세의 고령임에도 주 3일 출근해 기술 분야의 업무를 처리하고 있다. 1949년 일을 시작한 이후 현재까지 그는 석유 정제, 석탄화학 분야에서 중국 최초와 세계 최초를 여럿 기록했고 퇴직 후에도 중국 석유화학계의 인재 양성을 위해 저술에 힘썼다. 시대가 어떻게 변하든 그는 조국에 대한 사랑과 일에 대한 열정으로 자기의 자리를 굳건히 지켰다.
 
2010년 6월, 천쥔우 등이 바오터우 선화 180만톤/연 DMTO-II 장비 가동 전 검사를 하고 있다. 사진/시노펙 뤄양공정유한공사 제공

국가와 민족 부흥을 위해 배운 것을 쓰다
천쥔우의 70년 커리어의 핵심은 ‘석유’다. 원적이 푸젠(福建)성 창러(長樂)시인 천쥔우는 1927년 3월 베이징(北京)의 학자 가문에서 태어나 문화적인 분위기에서 가정 교육을 잘 받고 자랐다. 중학교 때 화학에 흥미가 생겼다. 1944년 17살이었던 천쥐우는 우수한 성적으로 베이징대학교 공학원 응용화공과에 입학했다.
 
당시 중국 사회는 불안정했고 광공업 기업은 쇠퇴했다. 1946년 대학 2년생이었던 천쥔우는 랴오닝(遼寧)성 푸순(撫順)시의 석유 공장을 참관하면서 일본인이 버리고 간 석탄액화 생산장비와 낙후된 중국 석유공업의 현실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 그는 석유공업에 투신해 자기가 배운 것을 국가와 민족 부흥에 보태겠다고 결심했다.
 
가슴에 품은 ‘석유 꿈’을 이루기 위해 대학생활 4년 동안 공부에 매진했다. ‘바깥의 봄은 나와 상관없다. 마음이 향기로 충만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천쥔우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시국이 아무리 불안해도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공부 뿐이었다.
 
푸순 석유2공장 북 촉매작업장 문 앞에는 ‘중국 최초의 유동·접촉·분해 장비-1965년 5월’이라고 쓰여진 비석이 있다. 이 비석은 중국 정유공업의 ‘금화 5송이(五朵金花)’ 중 하나로 석유업 종사자들의 성실한 노동의 결실이다. 이 장비의 설계사가 바로 천쥔우다.
 
유동·접촉·분해는 정유공업의 핵심기술로 투자비가 적고 운영비가 낮으며 원료 적응성이 강하다는 특징이 있어 석유 정제 기술에서 제일 중요한 전환 공정 중 하나다. 당시 이런 장비는 서방 선진국도 20여 개 뿐이었고 기술도 봉쇄돼 있었다.
 
1960년대 다칭(大慶)유전이 개발되면서 원유 공급 부족이 완화됐지만 당시 국내 정유기술은 수요를 따라가지 못했다. 낙후된 구 소련 기술을 많이 사용해 원유 가공 효율이 떨어졌고 양질의 경질유 제품을 충분히 추출할 수 없었다.
 
“좋은 벼가 있는데 맛있는 쌀밥을 먹지 못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천쥔우는 이렇게 비유했다.
 
당시의 중국은 자체 개발 정유 신기술이 절실했다. 1961년 겨울, 당시 석유공업부는 추출 연구, 설계, 제조, 기간산업, 생산 등 분야의 핵심 역량을 결정하고 유동·접촉·분해, 플랫포밍(platforming), 딜레이드 코킹, 요소탈랍과 촉매제, 첨가제 등 5개 정유 공정 신기술을 자체 개발해 낙후된 중국 정유공업 기술을 하루 빨리 탈바꿈하겠다고 선언했다. 이 5개 항목이 이후 정유공업의 ‘금화 5송이’가 됐다.
 
당시 34세였던 천쥔우는 중국 최초의 유동·접촉·분해 장비 설계사가 됐다. 그러나 장비는 어떤 모양이고 어떻게 설계해야 하며 어떻게 제조해야 하는지 천쥔우는 자신이 없었다. 어떻게 할 것인가? 그는 돌다리도 두들기며 건너기 위해 자료를 탐독하고 분석 계산하고 대조 논증하면서 시행에 옮겼다. 천쥔우는 하루에 열 몇 시간씩 일했고 머릿속에는 온통 데이터와 방안으로 가득했다.
 
이런 치열한 업무 환경과는 대조적으로 그와 동료들의 생활은 어려웠다. 1962년 중국은 어려운 시기여서 설계에 참여한 직원들에게 변변한 식사조차 제공되지 못했다. “당시 베이징설계원 지도자는 우리에게 늘 ‘미안하다’고 하면서 ‘동지들이 고생이 많다. 식사도 부실해 낮에는 배추국에 저녁에는 배추찜이라 너무 미안하지만 정말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고난의 세월을 회상하면서 천쥔우는 감개무량한 듯했다.
 
그는 과학으로 나라에 보답하려면 희생정신이 필요하고 그래서 이를 악물고 버텼다고 말했다.
 
긴장 속에서 3개월 동안 작업한 결과, 주요 기술 방안이 완성됐다. 천쥔우와 동료들은 대량의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했다. 그러나 자료는 참고용일 뿐 설계는 스스로의 힘으로 해내야 했다. 특히 주요설비는 중국이 자체 개발해야 했다. 수백 개의 측정기, 수천 개의 크고 작은 개폐기, 2만 미터에 달하는 파이프 라인을 정확하고 오차없이 설계해야 했다.
 
천쥔우 앞에는 복잡하고 무거운 짐이 놓여있었다. “우리의 혁신정신은 그때 길러진 것으로 현 상황에 안주하지 않고 늘 혁신을 꾀했다.”
 
천쥔우의 주도로 1963년 설계도면 1000여 장이 완성됐고 1964년부터 시공에 들어갔다. 천쥔우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현장에 ‘파묻혀’ 지냈고 멈추지 않고 돌아가는 팽이처럼 바빴다.
 
1965년 5월 5일, 지평선 너머로 여명이 밝아오자 푸순 석유2공장 남단에 위치한 연산 60만톤 규모의 유동·접촉·분해 장비가 웅장한 자태를 드러냈다. 4년 여의 노력 끝에 중국이 자체 개발하고 설계하며 시공한 첫 번째 ‘금화’가 가동에 성공해 중국 정유기술이 20년을 뛰어넘어 당시 세계 선진 수준에 근접했다.
80년대 이후 ‘흰쌀만 먹는(원유 중의 납유 성분)’ 유동·접촉·분해 장비만으로는 중국의 휘발유와 중유 수요를 만족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원료원을 확대했다. 잔유도 유동·접촉·분해의 원료로 사용됐으며, 휘발유와 중유 생산량 증가가 중국 정유 과학기술 종사자의 중요한 목표가 됐다. 천쥔우와 민언쩌(闵恩澤) 두 원사는 이 ‘6차 5개년’ 중요 연구과제의 중요 임무를 맡았고 각각 정·부 조장을 담당했다. 1987년 자체 지식재산권을 지닌 잔유의 접촉·분해 기술을 개발해 중국 정유공업은 ‘흰쌀만 먹던 상태에서 잡곡도 먹을 수 있게’ 됐다.
 
거시적으로 에너지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
90년대 초 책임자 자리에서 물러난 천쥔우는 국가 에너지 안보를 위해 석유 대체 문제를 중점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2000년 전후로 10년 동안 중국은 원유 대외 수입 의존도가 높아져 천쥔우는 국가 석유 대체 전략 연구에 나섰다. 그는 중국과학원 다롄(大連)화학물리연구소와 협력해 DMTO-II 확대와 응용 작업을 진행해 중국 석탄자원 전환 및 이용에 새 길을 열었다. DMTO-II는 석탄화학과 석유화공의 다리 역할을 했고 2014년 ‘국가기술 발명상’ 1등상을 수상했다.
 
2010년 8월, 천쥔우가 설계한 세계 최초이자 세계 최대 규모의 180만톤 급 DMTO-II 시범 장비가 네이멍구(內蒙古) 바오터우(包頭)에 건설돼 중국 자체 지식재산권을 지닌 핵심기술이 됐다.
 
21세기 초, 70세가 넘은 천쥔우는 자기 연구 분야와 관계없는 분야인 전 세계 기후변화 및 탄소 배출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다. “단순히 구체적인 기술 작업에 만족하는 게 아니라 거시적 측면에서 전 인류의 입장으로 에너지 문제를 이해하고 싶었다.” 천쥔우는 국내외 관련 데이터를 광범위하게 수집해 3년에 걸쳐 24만자 분량의 <중국 중장기 탄소 감축 전략 목표 연구(中國中長期碳減排戰略目標研究)>를 저술해 중국 탄소 배출 정책 제정, 에너지 구조 조정, 에너지 사용 효율 제고, 국민경제 지속 발전에 과학적인 제안을 내놓았다.
 
32세 전국 노동 모범 선발, 58세 국가 과학 진보 1등상 수상, 64세 중국과학원 학부 위원 선정, 88세 국가기술발명 1등상 수상 등…… 60세 이후에도 천쥔우는 30여 년을 더 일했지만 그는 “내가 많은 영예를 얻었다고 해서 쉬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런 사명감과 책임감이 있어 천쥔위는 기술적 난제를 극복하고 새로운 전기를 쓸 수 있었다.
 
“국가의 흥성을 보는 게 나의 가장 큰 바람이다.” 입당한 지 63년이 된 천쥔우의 마음의 소리로 “중국공산당에 입당한 그날부터 나는 조국에 부름에 응해 과학으로 헌신한다는 준비를 마쳤기 때문에 아무런 원망도 후회도 없다”고 말했다.
 
2014년, 천쥔우는 학생들과 산시(陝西)성 징볜(靖邊)에 위치해 있는DMTO-II 설비를 참관하고 있는 모습 사진/시노펙 뤄양공정유한공사 제공

청년들은 내 어깨를 밟고 성장하라
2016년 3월 26일 오후 1시, 허난성 뤄양시의 한 주택단지. 승용차에서 내린 천쥔우는 차 옆에 서서 바로 떠나지 못하고 뒷좌석을 가리키며 “그 카네이션 이리 주게”라고 말했다.
 
이 꽃에는 ‘20만 위안’의 감동적인 이야기가 담겨있었다. 2010년, 80세가 넘은 천쥔우가 앞장서 정저우(鄭州)대학교 화공 및 에너지학원에 허난성 석유 보충 대체에너지 연구 원사 워크스테이션을 개설하고 ‘바이오 에너지 석유 염기 운수 연료 대체 평가 및 대조 논증(生物能源替代石油基運輸燃料的評估和對比論證)’ 과제 연구 작업을 했다. 6년 동안 천쥔우는 매달 정저우대학교에서 강의하고 토론했으며 쑨페이친(孫培勤) 교수 연구팀을 지도했다.
 
6년 동안 천쥔우는 화공 및 에너지학원에서 지급한 보수를 한 푼도 받지 않았고 학원이 어떠한 비용도 부담하지 않도록 했다. 팀이 단계적인 성과를 거뒀을 때 화공 및 에너지학원은 천쥔우에게 6년 동안 마땅히 받아야 할 보수를 지급했다. 그러자 천쥔우는 20만 위안에 가까운 돈을 전액 기부하기로 했다.
 
그날 오전 천쥔우는 정저우대학교를 방문해 이 일을 끝냈다. 기부행사가 끝나고, 천쥔우는 학교 측의 초대는 사양했지만 학생들이 전한 꽃은 흔쾌히 받았다. 그는 이 꽃을 병상에 누워있는 부인에게 줄 것이라고 말했다.
 
천쥔우는 노년에도 기꺼이 자기를 희생해 중국 석유화학계를 위해 수많은 인재를 양성했다. 문호지견(門戶之見· 학문 파벌들의 견해)을 타파해 독특한 교학 방식의 고급 연수반을 개설했고 당시 연수반의 수많은 학생이 현재 석유화학 업계의 기술 전문가로 활약하고 있다.
 
2019년 10월 7일, 중국공산당 중앙 선전부는 천쥔우에게 ‘시대의 모범’이라는 명예 칭호를 부여했다. 천쥔우는 이것을 겸허히 받아들이며 “우리 나라는 지금 아주 좋은 시대에 있고 전진의 발걸음이 뚜렷하게 빨라지고 있다. 더 많은 청년 동지가 내 어깨를 밟고 더 높은 곳에 서며 보다 빨리 성장해 과학기술 혁신이라는 길을 용감하게 걸어 나가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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