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위치 :  >> 칼럼 >> 본문

<황제내경>이 고대 한국에 대한 영향


2023-11-20      



<황제내경(黃帝內經)>은 현존하는 중국 최초의 의학서다. ‘의가지종(醫家之宗)’이라고 불리며 후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 <난경(難經)>, <상한잡병론(傷寒雜病論)>,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과 더불어 중국 전통의학의 4대 경전이라고 불린다.


<황제내경>은 <영추(靈樞)>와 <소문(素問)>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황제소문>이라고도 불리는 <소문>은 중국 의학의 기초이론과 임상 실천을 종합하고, 철학과 자연과학도 많이 수록해 의술가들이 중요하게 여겼다. <소문>은 대부분 황제(黃帝)와 기백(岐伯)의 문답으로 구성돼 있어 고대 중국에서는 의술을 ‘기황지술(岐黃之術)’이라고 했다.


<황제내경>을 공부한 고대 한국 의관

서기 692년 신라 효소왕은 의학 인재를 양성하는 국가 교육기관인 ‘의학(醫學)’을 처음으로 설립하고 의학 박사 2인을 배치했다. 의학에서 사용한 교재는 대부분 <소문>과 <난경>, <신농본초경> 등 중국 의서였다. 고려시대 통치자는 의학 인재 양성을 중요하게 여겼고, 고려 인종은 시험을 통해 의관을 선발하라고 명령했다. 시험 내용에 <소문>이 포함됐다.


조선시대에는 의관 양성 제도가 더 체계적으로 정비됐고 <소문>의 중요성은 더 강화됐다. 조선 세조는 예조(禮曹)에 시험으로 인재를 선발할 때 기초지식 외에 <소문>도 시험을 보라고 명했다. 이후 예조는 세조에게 의관을 양성할 때 <소문>을 강의하는 관리를 정삼품, 종삼품으로 규정해달라고 건의했다. 이는 다른 의서를 강의하는 관리보다 높은 관직이었다. 영조 시대 전의감은 의관 선발 시험 과목에서 <득효방(得效方)> 등 6개 의서는 제외할 수 있지만 <소문> 등 의서는 더 중요하게 다뤄야 한다고 했다.


1452년, 삼의사제조 이선제는 국왕에게 올리는 보고서에서 의학생 중 옥석이 섞여 있다며 의학생은 반드시 <소문>의 요지를 알아야 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진맥과 치료를 할 수 없다고 했다. 1518년, 대신 김정은 중종에게 올리는 상소에서 조선에 의학 인재가 많이 부족하다고 지적하고 <영추>와 <난경> 등 의서가 여러해 동안 출간되지 않아 중국에서 구해와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면서 이런 의학 경전을 인쇄해 널리 보급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1672년, 약방 제조 정지화는 현종에게 올리는 보고서에서 많은 의서가 잘 보존되고 있지 않다며 특히 <소문>은 의서 중에서도 특히 중요한데 산실(散失)이 너무 많다고 지적했다. 그는 조정의 재정 어려움을 고려해 호조에서 20권의 종이를 나누어 받아 빠진 부분을 보충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1751년, 의관 김수규는 영조에게 올리는 보고서에서 의술가는 <소문>을 중요시한다고 했다. 1770년, 도제조 김치인은 영조에게 <소문>은 ‘의서의 근본’이므로 의료사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반드시 읽어야 한다면서 <소문> 인쇄를 건의했다.


의관 선발 시험에는 <소문> 등 의서가 포함된 것은 물론 수험생이 <소문>의 전문을 다 외우면 가산점을 주었다고 <속경국대전>에 기록돼 있다. 이 밖에 <수교집록(受敎輯錄)>에도 의사(醫司)에서 인재 선발 시험을 볼 때 <소문>을 핵심 서책으로 정했다.


조선의 국왕과 <황제내경>

1412년, 조선 태종은 충주사고(忠州史庫)에 도서를 진헌(進獻)하라고 명했다. 이 가운데 <소문>과 <광제방(廣濟方)> 등 중국 의서도 포함됐다. 세조는 <소문>에 관심이 많아 의관 이길보에게 <소문>을 강의하라고 하면서 그의 학문을 시험했다. 1644년, 인조가 병에 걸리자 의관들은 진료와 치료를 하면서 <소문>의 내용으로 국왕의 병세를 분석하고 판단했다. 1660년, 현종이 병에 걸리자 의관들은 연일 시침 치료를 했다. 이에 대신들은 국왕이 연일 침을 맞아 신체가 상할까 걱정했다. 그러자 의관들은 <소문>에 있는 이론을 들어 침은 몸에 무해하다고 말했다. 1715년, 숙종이 병에 걸리자 의관들은 병세를 파악하고 치료 방안을 논의했다. 의관 이시성은 <소문>에 있는 내용대로 땀을 내 장의 기운을 원활하게 하면 소변 배출이 잘 된다는 방법을 제시했고 다른 의관들이 찬성했다. 1758년, 영조가 병이 나자 의관 김복령은 <소문>의 비위 관련 이론을 인용해 영조의 병은 위의 기능이 떨어져 그런 것이라고 진단했다. 1774년, 영조는 내의관에게 <소문>을 갖고 입궐하라고 명하고 부제조 홍낙순에게 <소문>을 읽고 감상을 말하라고 했다. 이것은 영조가 <소문>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는 사례다.


조선 인사와 <황제내경>

조선 중기의 문신 곽열은 벼슬길이 여의치 않자 초야에 은거하는 친구를 위로하기 위해 쓴 시에서 “참동식묘계, 소문득신방(參同識妙契, 素問得神方)”이라고 했다. ‘참동’은 중국 도가의 양생 경전인 <참동계(參同契)>다. 그는 시로 친구의 처지를 위로하면서 심신을 잘 다스리고 그 안에서 기쁨을 느끼는 정신적인 태도를 표현했다. 문신 구봉령은 후배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북송의 관방 약전인 <화제국방(和劑局方)>과 <소문>은 ‘명맥과 근본을 논하는’ 좋은 책이라고 했다.


조선 후기의 문신 강재항은 <의설(醫說)>에서 현존하는 의서 가운데 “<소문>과 <난경>만이 고방(古方)”이라며 후세에도 명의가 나왔지만 고방의 기초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말했다. 이로써 그가 <소문>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 알 수 있다. 성리학자 이휘일은 <의약(醫藥)>에서 황제가 <소문>을 쓴 이유를 거론하면서 예부터 의약은 ‘백성의 목숨에 중요하고 나라에도 없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고 지적했다. 홍양호는 <마진휘성(麻疹匯成)> 서(序)에서 성인은 의약으로 세상과 백성을 구했는데 최초가 황제의 <소문>이라고 했다. 이민구는 <태의정군시고(太醫鄭君詩稿)> 서(序)에서 태의 정남수는 어릴 때부터 의술을 전수받았고 주로 <소문>과 <난경>을 공부했다고 언급했다.


실학자 이덕무는 친구에게 보낸 시에서 “여오병골증능수, 국침시번소문편(如吾病骨嶒崚瘦, 菊枕時翻素問篇)”이라고 했다. 이로써 <소문>은 당시 많은 인사가 몸을 보양하는 의학 참고서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학자 김창흡은 산에서 요양하고 있을 때 아들도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슬픔을 담은 시를 썼다. 그는 시에서 “산침공부수소문(山枕工夫須素問)”이라고 하면서 몸을 잘 보양해 건강을 회복하기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문신 허목이 문집 <기언(記言)>에서 언급한 ‘행림노인(杏林老人)’은 <소문>에 정통한 삼조 태의(三朝太醫)였다. 실학자 이규경은 <인수무한변증설(人壽無限辨證說)>에서 <소문>을 인용해 인간의 수명은 보통 아무리 길어도 120세라고 했다. 이는 오늘날 과학자가 말하는 인간의 수명과 거의 비슷하다.


이 밖에 <의방류취(醫方類聚)>, <의림촬요(醫林撮要)>, <제중신편(濟眾新編)> 같은 여러 의서에서 <황제내경> 내용을 인용했다. <의방류취>에는 “의자지경, 소문, 영추시야(醫者之經, 素問, 靈樞是也)”라면서 의원에게 <소문>과 <영추>는 유학자에게 오경(시경ㆍ詩經, 상서ㆍ尙書, 예기ㆍ禮記, 주역ㆍ周易, 춘추ㆍ春秋)과 같이 중요하다고 했다. 문신 기정진도 <소문>과 <본초>는 의원에게 국왕의 <상서>와 마찬가지라고 했다. 이렇듯 <황제내경>은 고대 한국의 의학 발전에 매우 큰 영향을 주었다.



글|위셴룽(喻顯龍), 상하이(上海)외국어대학 글로벌문명사연구소 전임연구원

 

240

< >
U020231102548226725392.png

한국의 탕후루(糖葫蘆) 경제

올 여름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길거리 음식은 탕후루였다. 거의 모든 번화한 상가에서 적어도 하나의 탕후루 매장을 찾을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읽기 원문>>

중국 신소비 이끄는 ‘콘서트 경제’

중화권 연예인 쑤유펑(蘇有朋)이 연말부터 전국 투어 콘서트를 열 것이란 뉴스를 최근 접했다.

읽기 원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