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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임제종의 시조, 보우선사


2022-06-13      



임제종(臨濟宗) 한전불교(漢傳佛敎, 중국에서 전개된 불교)  중요한 불교 종파이다. 중국의 다수 지역에서 정통 선종으로 여겨질  아니라 조선반도(한반도) 일본에도 매우  영향을 미쳤다. 현대 한국의 여러 불교단체는 임제종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 고려시대의 보우선사(普愚禪師) 바로 조선반도 임제종의 시조이다. 보우(1301~1382)선사의  법명은 보허(普虛), 호는 태고(太古)이며, 속성은 (洪)씨로 고려 홍주(洪州,  충청남도 홍성군)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함이 남달랐던 보우는 13세에 출가하여 회암사 광지선사의 제자가 되었으며, 청년시절에 이미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불교 이치를 깨치고 게어(偈語) 이해하는  경지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끊임없이 정진하였다.


바다 건너가 선사의 제자가 되다

서기 1340년경, 보우는 우연한 기회에 홍법(弘法) 위해 고려를 방문한  (元)나라 승려를 만나게 된다. 원에서   스님은 깊은 불교 지식을 바탕으로 변론에 능했으며, 불교 이치에 따라 문제의 본질을 간파했다. 보우는 그의 학식에 깊이 탄복하였고, 원의 승려 또한 보우의 학식을 매우 높이  중국 강남지역으로 유학을 떠날 것을 적극 권유하였다.


1346, 원대도(元大都,  베이징(北京)) 도착한 보우는 우선 대관사(大觀寺) 머물었다. 보우의 명성을 들어왔던 원순제(元順帝) 자신의 생일에 그를 초대하여 <반야경> 강설을 청한다. 이로써 보우는 원에서 크게 이름을 떨치게 된다. 1347 , 보우는 원대도를 떠나 남소(南巢, 현재의 안후이(安徽) 차오후(巢湖)) 축원성(竺源盛)선사를 찾아간다. 그러나 도착해서야 선사가 별세했다는 소식을 알게  보우는 호주(湖州) 하무산(霞霧山, 현재의 저장(浙江) 후저우(湖州) 샤무산(霞幕山))으로 향해 당시 저명한 승려 청공(淸珙)선사를 방문한다. 청공은 임제종의 19 법손으로 아주 깊은 경지에 도달한 승려였다.


청공을 만난 보우는 자신이 지은 게어를 들려주었고, 청공은 고려에서  승려의 수행에 크게 놀랐다. 청공은 선기(禪機) 문답으로 보우의 깊이를 가늠했고, 보우 또한 유창하게 대답했다. 이에 크게 만족한 청공은 보우를 제자로 받아들였다. 보우는 청공의 곁에 오래 머무르며 수행하고자 했으나, 임제종을 고려에 전파하기를 바랐던 청공은 의발을 보우에게 전수하고 홍법에 힘쓸 것을 당부했다.   음력 10, 보우는 청공을 떠나 원대도로 돌아온다.  황실은 보우가 청공의 제자가 되었다는 것을 알자 그를 더욱 중시하며 영녕사(永寧寺) 머무르라 청한다.


원과 고려를 오가며 홍법(弘法)…


스승의 은혜를 잊지 않다

보우는 스승 청공과 자주 서신을 주고받았다. 원나라 태자의 생일을 맞아 원순제는 보우에게 영녕사에서 강연할 것을 청했고, 금빛 가사와 침향 불자를 하사했다. 원나라 황후, 태자, 태사 등이 재물로 보우를 공양했으며, 그를 따라다니며 법회에 참석하는 귀족 남녀가 줄을 이었다. 훗날 공민왕이 되는 고려의 강릉대군 또한    명이었다. 강릉대군은 고려의 승려가 원나라에서 이토록 주목받는 것에 크게 탄복하며 “고려의 정권을 잡게 되면  스승으로 모시고 싶다 진심을 전했다. 1348 , 보우는 2년간의 원나라 유학을 마치고 고려로 돌아와 다시는 속세에 발들이지 않고 홀로 수행하겠다며  속에 은거한다.


1352, 공민왕은 즉위하자마자 사람을 보내 보우에게 입궁 설법을 청했다. 거절했음에도 포기하지 않고 여러 차례 초청하자 어쩔  없이 상경하여 설법한다.  , 보우는 다시 은거를 시작했다. 1356, 공민왕은 다시 한번 보우를 봉은사로 초대하여 엄청난 규모의 법회를 연다. 공민왕은 법단에서 은발(銀鉢) 금수 가사 등을 공양했는데  양이 ‘산처럼 쌓였다 기록이 있다. 보우의 300 제자들도 각기 백포(白布) 2, 가사 1벌씩을 받을 정도였다. 법회가 끝난 , 보우는 다시 은거를 청했지만, 공민왕은 이를 거절하고 그를 ‘왕사(王師)’ 책봉한  광명사(廣明寺) 남을 것을 요청했다. 그리고는 특별히 보우를 위해 광명사에 관청기관인 원융부(圓融府) 설치하고, 좌우 사윤(司尹), (丞), 사인(舍人), 주부(注簿)  보좌진을 배치했다.


1352, 청공이 원에서 입적했다는 소식이 빠르게 고려까지 퍼졌다. 보우는 스승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과거 스승의 당부를 되새기며 공민왕에게 수차례 상서하여 은사의 사리  일부를 고려에 모실  있도록 원에게 청할 것을 간청한다. 공민왕은 기꺼이 이를 받아들여  황실에 보우의 청을 전달한다. 이들의 미담에 감동한 원순제는 고려 사신의 호주 하무산 참배에 동의하고, 이로써 청공의 사리  절반이 고려로 옮겨진다.


선문 통합, 후대에 길이 존경받다

공민왕은 보우를 ‘국사 책봉하며 “지금부터 선종(禪宗) 교종(敎宗) 종문(宗門)에서 사찰의 주지는 왕사(王師) 추천을 받아 임명할 것이고, 과인은 단지 임명장만 내릴 이라 선포한다. 당시 고려의 승려들은 모두가 보우의 제자가 되기를 바랐기 때문에 보우는 단숨에 고려 불교계의 지도자가 되었으며, 임제종의 영향력도 빠르게 확대되었다. 보우는 이를 기회 삼아 구산선문(九山禪門) 통합하고자 했고, 이는 훗날 조선반도 불교 발전에 엄청나게 기여했다. 자신의 후계자로 보우를 선택했던 청공의 예리한 안목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불교 교류 외에도 보우는 중국의 선차(禪茶)문화를 고려에 전파했다고 전해진다. 보우의 스승 청공이 살던 호주 지역은 유례 깊은 차문화로 유명하다. 다성(茶聖) 육우(陸羽) <다경(茶經)> 집필한  또한 호주이다. 다도에 매우 능했던 청공은 하무산에서 직접 차를 재배했으며, 아무런 꾸밈없는, 담백하고 청아한  본연의 맛을 추구했다. 보우도 천연을 추구하는 선차사상을 따랐으며, “운문 호병과 조주차도 절의 조미 없는 음식만 못하다(雲門糊餠趙羽茶, 何似庵中無味食)” 시구를 남기기도 했다.  풍미가 짙은 음식이 간이   사찰음식보다 못하다는 말이다.


1382, 보우가 열반에 들고, 시호는 원증(圓證)이라 했다. 3 , 태고사에 원증국사(圓證國師)탑비가 세워졌고, 비문은 고려 문신 이색이 지었다. 흥미로운 점은, 대유학자인 이색이 불교 승려인 보우를 아주 높이 평가했다는 것이다. “화하(華夏) 이름을 널리 떨치고, 사리가 고금을 비추네!” 그러나 이색도 보우의 영향력이 ‘고금 비추었을 뿐만 아니라 ‘미래 중한 교류의 연결고리가 되리라는 점은 몰랐을 것이다. 660 ,  지난 2008, 한국 국제선차문화연구회  단체의 인사 40 명과 중국 선차학계 인사들은 호주 샤무산에 새로운 석비인 ‘중한우의 기념비 세워 보우선사와 청공간 사제의 정을 기렸다.   이곳은 한국 불교단체, 민간단체, 그리고 수많은 관광객들이 매년 방문하여 양국간 길이 전해지는 미담을 되새기는 장소가 되었다.  


위셴룽(喻顯龍), 상하이(上海)외국어대학교 글로벌문명사연구소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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