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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땀 한땀 칼로 새긴 예술 혼뤄펑펑 예술가의 전각 인생


2023-09-21      글|위안수(袁舒)

전각은 수천 년 동안 계승된 중국의 전통예술이다. 서예와 조각 기법을 결합해 평면적인 문자를 석재 등 재료 위에 새겨 정교하고 아름다운 인장으로 만든 것이다. 예부터 전각은 중국인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일부였고 중국의 한자 발전과 함께한 살아있는 화석이다. 2006년 중국예술연구원 중국 전각예술원이 설립됐고, 2009년 중국 전각이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에 등재됐다. 이런 역사적인 사건 배후에는 전각 예술을 위해 묵묵히 헌신한 여성이 있다. 바로 ‘신도녀(神刀女)’라고 불리는 전각 예술가 뤄펑펑이다. 뤄펑펑 예술가는 22세에 전각계에 입문해 40여 년 동안 전각에 헌신했다. 그녀는 호방한 전각 스타일로 전각계를 누볐고 전각 문화를 유지·발전시키는 데 혼신의 힘을 다 쏟았다.




전각 예술의 씨를 뿌리는 사람

은·상(殷商)시대에 시작된 전각은 탄생 때부터 사회 문화 속성을 지녀 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명·청(明淸)시대부터 인장은 예술품으로 감상되고 창작됐다. 최근 20년 동안 전각 개념의 외연이 크게 확장돼 상징적인 의미가 한층 강해졌다. 대표적인 사례가 상징인(印)이다. 가장 널리 알려진 상징인은 2008년 베이징(北京)올림픽 휘장이다. 베이징올림픽 휘장은 전 세계에 전각이라는 예술 형식을 알렸고 국경을 초월한 아름다움으로 세계의 인정을 받았다.


올림픽 휘장 디자이너팀 대표인 궈춘닝(郭春寧)은 중앙공예미술학원 재학 시절 뤄펑펑 예술가의 전각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그의 전공은 서양화였지만 학과 과정에 전각 관련 수업이 있었고 그 수업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인장의 양문이나 음문의 배치는 서양미술의 디자인학과 일맥상통한다. 동서양 철학을 결합한 수업은 학생들에게 매우 유익했다. 이런 수업을 통해 학생들의 마음에 중국 인장의 씨앗을 심으면 여러 해 뒤 생각하지도 않은 곳에서 결실을 맺을 수 있다.” 뤄펑펑 예술가의 말처럼 궈춘닝 대표의 마음속에 싹 튼 씨앗이 2008년 올림픽 휘장 디자인을 할 때 꽃이 피고 결실을 맺어 전 세계인의 마음속에서 춤을 추는 올림픽 상징인이 탄생했다.


“나는 청소년 시절의 교육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스며들게 하는 교육은 아이들의 마음에 중국인의 씨앗을 뿌리는 일이다. 아이들이 자라서 모두 전각가가 되지는 않겠지만 그들의 마음속에 있던 씨앗이 언젠가는 싹이 터 좋은 기회를 만날 것이다.” 이는 뤄펑펑 예술가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말이다. 그녀가 처음으로 전각을 접한 것은 일곱 살 때로 아버지의 가르침에 첫 인장인 ‘펑쯔(芃子)’를 만들었다.


이후 뤄펑펑 예술가는 오랫동안 전각을 다시 만나지 못했지만 그녀의 마음속에 뿌려진 전각의 씨앗이 여러 해 뒤에 싹이 터 그녀는 조각칼을 쥐게 되었고 그렇게 40여 년이 흘렀다. 이런 이유로 뤄펑펑 예술가는 청소년 대상 전각 보급과 교육에 힘을 아끼지 않는다. 현재 교육부와 국가언어문자공작위원회가 주관해 매년 전국 초중고대학생과 교사를 대상으로 ‘인기중국(印記中國)’ 교사 학생 전각대회를 개최해 많은 청년들이 전각 세계로 진입하고 있다. 뤄펑펑 예술가는 학술 및 심사 조직 작업을 책임지고 있다.




“전각은 내 생명의 일부분”

전각 이야기가 나오자 뤄펑펑 예술가는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그녀는 “전각은 내 삶의 일부분”이라고 말했다. 시대가 변하면서 뤄펑펑 예술가는 전각 예술의 존속이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라는 것을 깨닫고 두 가지 일을 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와 전각을 독립 학과로 만드는 것이었다.


“전각 예술이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성공한 것은 본질적으로 말하면 전각이 국제사회에서 ‘호적’이 생긴 것이다. 이로써 전각은 쉽게 사라질 수 없고 생존을 위해 잘 전승하고 보호될 권리를 부여받았다.” 뤄펑펑 예술가의 노력으로 전각 예술은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성공해 진정한 의미에서 국제무대로 나가게 됐고 국제적으로 더 많은 존중과 보호를 받게 됐으며 자금 지원과 전승 기회를 갖게 됐다.


마찬가지로 뤄펑펑 예술가는 오랫동안 전각을 독립학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전각을 교육 시스템에 편입시켜야 지속적이고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다”고 그는 강조했다.


전각이 하나의 독립된 학과로 설립돼야 좋은 인재를 더 많이 배출할 수 있고 장기적인 생존과 발전의 기반이 마련된다. 뤄펑펑 예술가는 앞장서서 전각학과를 설립했고 전국적으로 유사이래 최초로 전각 예술 석사, 박사 과정을 설치해 학생들을 집중 양성했다.


“과거 사람들은 전각에 대한 오해가 있었다. 도장 파는 사람은 모두 장인이고 학문이 없어 고상한 자리에 오르지 못한다는 것이다. 원나라 문인들이 이 분야에 들어와 전각을 자기 수양의 취미로 삼고 나서부터야 이런 관념이 변했다.” 때문에 뤄펑펑 예술가는 학생을 선발할 때 조각 기술 외에 종합적인 자질을 매우 중요시했고 교양 교육에 힘썼다.


그녀는 다원화된 지식 체계를 가져야 전각예술 전승이라는 중요한 사명을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애정은 창작의 원동력

중국예술연구원 전각원 설립 이후 원무나 교육 업무가 아무리 많아도 뤄펑펑 예술가는 모두 직접 다했다. 그러나 예술가로서 자신의 작품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학교 업무 때문에 개인 창작시간을 많이 낼 수 없지만 뤄펑펑 예술가는 주말에는 보통 외출하지 않고 자신의 작업실에서 창작에 몰두한다. “새벽 1~2시에 잠을 자는 생활을 40여 년이나 했다. 내 나이가 되면 몸이 불편할 때도 있지만 병원 갈 시간도 없고 병원 가기도 무섭다.


오랜 세월동안 제일 미안한 건 가족이다. 집안일 대부분을 가족이 대신해주었다. 나는 좋은 주부는 아니었지만 가족은 나에게 원망의 소리 한번 하지 않았고 그만두라고 하지도 않았다.” 가족의 이런 이해와 지지 덕분에 지금까지 달려왔기에 뤄펑펑 예술가는 가족에 대한 고마움이 각별하다. “전각 세계에는 삼라만상이 다 담겨있고 발전의 경지가 무한하다. 아직 내가 모르고 시도해보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설렌다. 아마도 이것이 나의 가장 큰 창작 열정이 아닐까 한다.” 지금도 뤄펑펑 예술가는 앞으로의 전각 인생을 말할 때면 기대감으로 눈이 반짝반짝 빛난다.


 

글|위안수(袁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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