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8-10 글|쑨창우(孫昌武)
편집자주: 중한 수교 이후 처음으로 한국의 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던 인물 중 한 명인 톈진(天津) 난카이(南開)대학의 쑨창우 교수는 한국에서 잊지 못할 아름다운 시간을 보냈다. 본지는 중한 수교 31주년을 맞아 쑨 교수에게 특별 기고를 통해 한국에서의 강의 경험과 한국 교수들과 나눴던 깊은 우정에 관한 사연을 요청했다. 쑨 교수의 개인적인 추억을 통해 사람 간의 교감과 소통에서 나오는 따스함과 힘을 느껴보았고, 이처럼 소중한 우정을 간직하고 양국 간 교류와 협력을 꾸준히 확대해 함께 중한 관계의 더 나은 내일을 만들어가고자 한다.
1994년 봄, 해인사 고려장경판을 조사하는 필자의 모습이다.
1992년 8월 24일 중국과 한국이 정식으로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이듬해 9월, 나는 한국 경상북도에 있는 영남대학교 이장우 교수의 주선으로 1994년 6월 중국으로 귀국할 때까지 이 대학의 초빙 교수로 임용됐다. 그 이후 나는 한국 친구들과 30년 넘게 우정을 이어왔고, 행운스럽게도 양국의 학술과 문화 교류에 미력하나마 힘을 보탤 수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밟은 한국 땅
1989년 내가 일본 교토대학 인문과학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있을 때의 일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한 한국 학자가 내 연구실을 찾아와 자신을 영남대학교의 이장우 교수라고 소개했다. 그는 자신이 교토대학 문학부장 시미즈 시게루 교수와도 잘 아는 사이라며 이번에도 시미즈 교수의 추천으로 내 연구실을 찾게 됐다고 말했다. 이 교수가 열흘 넘게 연구실을 자주 방문하면서 우리는 점점 가까운 사이가 됐고, 서로에 관해서도 많은 부분을 알게 되었다.
내가 귀국한 이후 이 교수는 그의 중국 방문 기회를 활용해 톈진에 있는 나의 집에 다녀갔다. 1992년 양국이 국교를 맺자 이 교수는 나를 1년 간 영남대학교 교수로 초빙하고 싶다는 서신을 보냈고, 나는 이를 수락했다. 그는 곧바로 교수 초빙을 위한 수속을 시작했지만, 당시 양국은 문화나 교육에 관한 교류 협정을 맺고 있지 않아 내가 한국 대학의 초빙 교수로 교편을 잡을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마침 이 교수의 친형이 한국 모 재단의 회장으로서 문화사업에 매진하고 있었고, 한국 ‘이퇴계 연구회’의 명예 회장직도 맡고 있었다. 이장우 교수는 융통성을 발휘해 이퇴계 연구회 명의로 나를 한국에 초청했다.
그러나 당시 주중한국대사관은 중국인에게 개인 비자를 발급해 주지 않았다. 그러자 이 교수는 외환은행 톈진 지사에 있는 자신의 지인에게 관련 수속을 부탁했고, 그 관계자의 도움으로 무사히 한국행 입국 비자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런 뒤 베이징(北京)에서 중국 민용항공기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당시 중국과 한국 사이에는 주 1회 오가는 유일한 항공편만 있었다. 항공기는 상하이(上海)에 잠시 머물렀다 일본을 우회한 뒤 쓰시마 해협과 한국 남부의 부산 상공을 거쳐 6시간여 만에 서울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공항 세관은 중국 여행객들에게 매우 깐깐했다. 그들은 내 캐리어를 하나씩 전부 열어보고 옷가지도 이리저리 꺼냈다. 나는 명목상 이퇴계 연구회의 초청으로 온 것이었기 때문에 이후 한국에서 어느 정도 이퇴계 연구와 관련된 일을 맡게 될 것을 예상해 고국에서 구한 이퇴계와 관련된 책 두 권을 손가방 안에 넣어두었다. 공항의 보안 검색요원은 “규정에 따라 검사하는 것이니 양해 부탁드립니다”와 같은 말을 하며 내 손가방을 살펴봤다. 곧 손가방에서 이퇴계 시집을 발견한 검색원은 순식간에 태도를 바꿔 내게 깍듯이 경례를 하고 순순히 나를 보내주었다.
김포공항에는 영남대학교 박운석 교수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우리는 한국 국내선으로 갈아타 대구공항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이장우 교수가 직접 차를 몰고 공항에 나와 우리를 맞이했다. 이처럼 많은 과정을 거쳐 나는 마침내 영남대학교에 도착했다.
한국에서는 매일 교직원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그곳의 식사는 밥 한 공기와 국 한 그릇, 그리고 몇 가지 반찬(소금에 절인 작은 생선과 도라지 등)이었다. 하지만 나에겐 매웠다. 며칠을 먹었더니 목이 따갑고 음식을 삼키기 힘들 정도였다. 결국 나는 아내를 불러달라고 요청했다.
1989년 겨울, 톈진 난카이 대학에 있는 필자의 연구실을 방문한 이장우 교수(우측)
‘타향’에서 느낀 ‘고향’의 정
영남대학교는 한국 남부의 경상남도 경산시에 위치해 있다. 전신은 대구대학교와 청구대학이다. 내가 영남대학교에 갔을 때는 양국이 막 수교한 상태라 문화·교육 관련 협정이 아직 맺어지지 않던 때라 나는 학교에서 정규 과목을 개설해 가르칠 수 없었다. 그러자 이장우 교수는 자신이 가르치는 두 개의 과목을 내가 대신 강의하고 자신의 월급을 받아가라고 했다. 영남대학교 중문과에는 10여 명 남짓의 학생들이 있었지만 중국어 수준이 생각만큼 높지 않았고 교과 과정도 촘촘하지 않았다. 중문과의 교수들은 하나같이 모두 친절했다. 특히 이장우 교수는 나를 친가족처럼 따뜻이 대해주었다. 영남대학교에서 근현대 중국문학을 가르치는 박운석 교수는 나이가 젊은 편에 속했다. 그는 중국 유명 소설인 <홍암(紅岩)>을 한국어로 옮긴 역자이기도 한데 나를 많이 배려해 주었다. 영남대학교 중문과 교수들 사이에는 독특한 ‘제도’가 하나 있었다. 바로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매일 교수들이 한 명씩 번갈아가며 모두에게 점심식사를 사는 것이었다. 그들은 한식과 양식으로 구분된 교직원 식당 두 곳 중 하나를 택해 점심을 함께했다. 식사를 하며 여러 가지 정보도 교류하고 업무적인 이야기도 나눌 수 있는 아주 좋은 ‘친목의 장’이었다.
아내가 한국에 도착하자 영남대학교는 우리에게 넓은 부엌이 딸린 숙소를 마련해 주었고, 이장우 교수 내외는 식기와 주방용품을 이것저것 사다 주었다. 내가 ‘점심 회식’을 주최해야 하는 순서가 되자 나는 모두를 숙소로 초청했고, 아내는 중국 요리를 만들어 대접했다. 학교 인근에는 한 화교가 운영하는 중국 음식점이 있었다. 한국 교수들도 자주 그곳을 찾아 중국 요리를 먹는다고 했다. 이곳에 온 뒤 나도 그 음식점으로부터 여러 번 대접을 받았다. 산둥(山東)이 본적지라는 주인의 요리는 상당히 투박했다. 한국 교수들은 아내가 만든 볶음 요리, 면 요리, 만두 등을 맛보고 ‘진짜 가정식 중국 요리’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아내가 중국 간장과 식초, 장 등의 조미료를 써야 중국 요리의 진풍미를 낼 수 있다고 하자, 그들은 중국 출장자에게 부탁해 그것들을 ‘공수’해 오기도 했다.
아내는 숙소 옆 시장에서 장을 보곤 했다.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손짓 발짓으로 한국 아주머니들과 소통했다. 한국 시장은 물건을 저울에 달거나 가격을 흥정하지 않았다. 보통 작은 소쿠리에 담거나 한 단씩 묶어 물건을 팔았는데, 아내가 한 소쿠리에 5~6알 정도 든 사과를 살 때면 인심 좋은 시장 아주머니들이 아내의 장바구니에 사과 1~2알쯤을 더 넣어주곤 했다.
한국 학생들 사이에서는 스승을 존경하고 예를 중시하는 전통이 잘 보존되어 있어 내게도 무척 친절하고 예의가 발랐다. 명절 때가 되면 꽃이나 식품, 생필품 등의 선물을 준비해주었고, 집에 찾아 올 때는 라면이라도 챙겨오며 빈손으로 온 적이 없었다. 강의동 복도에는 음료수 자판기가 있었고 학생들은 쉬는 시간마다 내게 커피나 차를 뽑아다 주곤 했다. 평소에도 모두가 친밀하게 안부를 물으며 가족처럼 편하게 대했다.
1994년 봄, 영남대학교 교수진 및 학생들과 함께한 필자(우측 첫 번째) 부부
한국에서 얻은 수확
이장우 교수는 내가 충분한 시간을 갖고 혼자 독서를 하거나 연구를 할 수 있도록 많은 수업을 배정해 주지 않았다. 당시 한국은 중국과 오랫동안 단절되어 있었기 때문에 학교 도서관에 중국 본토에서 출판된 중국어 책은 많지 않았지만, 대만에서 영인(影印)된 문란각(文瀾閣)의 <사고전서(四庫全書)>가 있었다. 중국의 대문호 루쉰(魯迅) 선생은 중국 역사를 연구할 때 당나라 이전의 자료가 많지 않다고 말한 적이 있다. 문학 연구 서적으로는 청나라 시대 엄가균(嚴可均)이 편집·교정한 <전상고삼대진한삼국육조문(全上古三代秦漢三國六朝文)>과 고대문학 연구가인 루친리(逯欽立) 선생이 편집·교정한 <선진한위진남북조시(先秦漢魏晉南北朝詩)>가 있다. 내용이 길지 않기 때문에 이 책들에 대해서는 꽤 잘 알고 있었다. 당나라 문학을 전공한 나는 당나라 사람들의 총집(總集)과 별집(別集)에 대해서도 오랫동안 연구를 해왔지만, 송나라 집부(集部)는 다소 생소했다. 나는 도서관에서 <사고전서>에 나온 송나라 사람들의 집부를 한 권씩 빌려 몇 개월 동안 이를 전부 살펴보고 내용을 발췌하거나 필기했다. 이 과정을 통해 송나라 시대 자료에 대한 이해가 한층 깊어진 셈이다. 이것은 내가 영남대학교에서 1년 동안 교편을 잡는 동안 예상치 못하게 얻게 된 수확이기도 하다.
한국에 머물렀던 시간은 1년도 채 안됐지만 나는 매우 빡빡한 일정을 보냈다. 서울에 있는 서울대학교와 고려대학교, 대구의 계명대학교와 경북대학교 등 여러 대학에서 초청을 받아 강연을 했고 각 대학의 교수, 학생들과 교류를 하기도 했다. 이장우 교수는 겨울방학 기간을 이용해 매주 1회 한국 남부 지역에 있는 대학교 강사들을 대상으로 내가 중국의 불교 문화에 대해 강의할 수 있는 워크숍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각지에서 수십 명이 영남대학교의 워크숍을 신청했고 나는 열 번 남짓 강의를 열었다. 나중에는 반응이 좋아 나의 강의 원고가 한국어로 번역 출판되기도 했다. 양국이 수교하기 전 한국에서 중국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중국 타이완(臺灣)에서 대학에서 공부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인지 당시 한국 사람들은 중국 본토에 대한 이해가 얕고 편견도 많았다. 나는 양국 수교 후 가장 먼저 한국 대학에서 교편을 잡은 교수였다. 한국에서 외부 강연과 언론 인터뷰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며 양국의 학술 교류를 촉진하고 교·강사와 학생, 일반인들에게 중국 대학의 교육과 연구 현황, 중국 문화의 발전 현황, 특히 개혁개방 이후 중국의 급속한 발전을 소개하고 알렸다.
1993년 9월 영남대학교 등산팀과 함께 등반길에 나선 필자(우측 첫 번째)
1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이장우 교수를 비롯한 여러 교수와 학생들은 나를 데리고 한국의 여러 지역을 방문했다. 한국은 면적이 크지 않은 나라이기 때문에 우리는 남쪽에서 북쪽으로 거의 전국을 다 돌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기억은 유서 깊은 역사문화 도시 경주를 방문했을 때였다. 그곳은 과거 1000년 가까이 정권을 장악했던 신라 왕조(기원전 57년~935년)의 수도 금성(金城)이 자리했던 곳이다. 경주를 대표하는 불국사는 8세기에 건축되었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불국사의 대웅보전에는 수려한 불상이 모셔져 있다. 이 불상과 대웅보전 앞의 다보탑, 석가탑은 한국의 국보이기도 하다.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된 신라시대의 여러 귀중한 문화재들은 한 점 한 점 빼어난 미를 자랑하며 문화·예술적 가치가 매우 높다.
또 하나 기억에 남는 것은 합천군 가야산에 있는 해인사에 초청 받아 방문했던 일이다. 해인사는 신라시대 화엄종 10대 사찰 중 하나로 ‘고려대장경’, 즉 ‘팔만대장경’으로 익히 알려진 경판(經板)이 보존된 곳으로 유명하다. 20세기 초에는 고려대장경 장외 경판에서 선종 역사 연구에 중요한 문헌으로 꼽히는 <조당집(祖堂集)>이 발견되어 삽시간에 국제 학술 연구계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당시 해인사는 경판의 문자 디지털화 계획을 세우고 있었고, 해인사의 사업 담당자는 이장우 교수와 나를 초청해 자문을 구했다. 사찰 관계자들은 우리를 정중하면서도 친절히 대접했다. 경판이 소장되어 있는 대전(大殿)으로 안내해 경판을 꺼내 자세히 관찰할 수 있도록 특별히 허락하기도 했고, 팔만대장경 원판을 탁본한 귀한 페이지(지금은 경판 보호를 위해 탁본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이 같은 원판 탁본은 굉장히 귀하다)와 해인사 범종 모형을 선물로 주기도 했다. 밤에는 여러 신도들과 함께 사찰 마룻바닥에서 선실(禪室) 문지방을 베개 삼아 누워 잠을 청했고, 다음날 새벽에는 스님과 신도들과 함께 절밥을 먹으며 한국의 사찰 생활을 제대로 경험하고 돌아왔다.
1993년 겨울, 함께 등산에 나선 필자 부부(가운데 두 사람)와 이장우 교수 내외의 모습
따뜻한 정과 넉넉한 인심
영남대학교 교수들은 친목 등산팀을 만들어 토요일마다 산 한 군데를 골라 등반했다. 나는 이 등산팀의 핵심 멤버인 이장우 교수의 적극적인 권유로 팀에 합류하게 됐다. 그들은 상당히 전문적인 팀이었다. 등산복을 입고 등산 스틱과 로프 등 등산 장비를 모두 갖추고 황폐한 고개와 암벽을 일부러 선택해 올랐다. 그들을 따라 등반할 때 어려운 코스가 나오면 누군가가 손을 뻗어 나를 부축했다. 큰 바위가 나오면 누군가가 로프로 나를 끌어올렸다. 평소 등산에 단련되지 않은 나는 금세 체력이 바닥나 식은땀이 나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현기증이 나 하마터면 쓰러질 뻔했다. 하는 수 없이 다들 멈춰 서서 내게 작은 인삼 뿌리를 주며 씹으라고 한 뒤, 잠시 쉬다가 체력이 회복되면 다시 힘내서 따라오라고 했다. 그때 누군가가 나뭇가지를 하나 구해와 내게 지팡이처럼 짚으라고 했다. 나무 지팡이를 짚고 걸으니 걷기가 한결 수월해졌다. 마침내 산 정상에 올라 발밑으로 겹겹이 우거진 산과 울창한 숲을 보니 비로소 가슴이 탁 트이고 모든 고통과 피로도 눈 녹듯이 사라졌다.
나는 한국에 머물면서 한국인들의 따뜻한 정과 친절을 깊이 체감했다. 중국에서 온 선생이 자신의 자녀를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아는 학부모가 한둘이 아니었고, 그들은 종종 특별히 만든 아침식사를 들려 보내기도 했다. 내 두 딸이 휴가차 한국을 방문해 우리 부부와 만나 시간을 보낼 때는 바깥 구경을 나갈 때마다 늘 길을 안내해 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는 좌석에 앉아 있는 사람이 내 손에 들린 짐을 가져다 자신의 몸쪽에 올려놓았다. 처음 이런 상황을 겪었을 때는 몹시 당황했지만 나중에는 한국인들이 평소 남을 돕기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런 분위기 덕분에 나와 같은 외국인들은 한국에서 살기가 무척 편하다고 느낀다.
1993년 겨울, 서울 남대문 시장 구경에 나선 필자의 가족
이장우 교수 부부는 인심이 넉넉하고 배려심이 깊었다. 명절이 되면 자주 우리 부부 내외를 불러 함께 주변을 관광하고 온천에 데려가거나 맛있는 음식을 대접했다. 우리는 부산에 내려가 명소를 둘러보고 태종대에 오른 뒤 범어사를 방문하기도 했다. 등산을 좋아하는 이 교수의 부인은 아내가 한국에 오자 우리 부부에게 함께 등산을 가자고 제안했다. 아내가 평소 몸이 약했기 때문에 이 교수는 늘 야트막한 산을 택했지만 그래도 아내는 등반 때마다 몹시 힘들어했다. 양복에 구두 차림으로 아이까지 안고 험한 산길을 가뿐하게 오르는 한국 사람들을 볼 때는 절로 탄복이 나왔다.
한번은 설 명절을 맞아 이장우 교수의 고향집에 초대받아 간 적이 있었다. 우리는 먼저 차로 동해안의 이름난 산업도시 포항시에 있는 포항공과대학교를 방문했다. 포항은 한국 금속산업의 중심지이다. 포항공과대학교는 규모가 크지 않은 이공계 대학으로서, 대체로 현지 금속산업을 위한 학술 기지 역할을 했다. 학생 수는 만명이 채 안된다고 들었는데 중국에서 이 정도는 규모가 매우 작은 학교에 속한다. 하지만 포항공과대학교의 교육과 연구는 세계 일류 수준이었다. 한국의 이름난 기업가인 이장우 교수의 친형 가족이 설 모임을 위해 서울에서 비행기를 타고 포항에 왔다. 그들을 수행하는 차량들도 미리 서울에서 내려와 대기하고 있었다. 차량 행렬은 포항에서 이 교수의 고향인 북쪽으로 향했다. 이 교수의 형은 내게 같은 차에 동승해 달라고 정중히 요청했다. 이 교수의 형은 현지 이씨 종친회의 회장이었다. 이 교수 가족이 오자 마을에서 이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전부 찾아와 그들에게 인사했다. 섣달 그믐날 밤 모두가 정원에 모여 술을 마실 때 여자들은 분주히 술상을 차렸다. 한밤 내내 분위기가 무르익어 갈 때도 여자들은 쉴 틈이 없었고, 남자들이 잠자리에 들었을 때도 여자들은 식기와 도구를 정리하고 설거지를 해야 했다. 이것은 한국의 오래된 풍습이었다. 다음날 아침 정원에서 세배가 이뤄졌다. 전통 한복을 입고 정원을 가득 메운 남자들이 상석에 앉은 이 교수의 형을 향해 가지런히 무릎 꿇고 절을 올렸다. 지금도 한국에 남아 있는 고대의 씨족 풍습을 목격했던 경험이었다.
2016년 11월 9일, 대구 계명대학교를 방문한 필자(좌측 네 번째)의 모습
연구 저술로 전하는 마음
이처럼 한국에서의 첫 초빙교수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친 후에도 한국의 학술 교류 활동에 참여할 기회가 여러 번 있었다. 그중에서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2015년, 동국대학교 주최로 서울에서 열린 ‘동아시아 문헌과 문학 속의 불교세계’ 국제회의에 아내와 함께 초청을 받아 갔을 때였다. 이 회의는 본래 나와 오랜 친분이 있던 동국대학교 중문과 학과장 박영환 교수와의 인연에서부터 시작된다. 박 교수는 나와 학문적 방향이 일치한다. 우리 둘 모두 당·송 문학을 전공했고 부전공으로 중국 불교문화, 특히 선종과 선문학을 연구했다. 박 교수가 학술회의 참석차 중국을 수차례 방문할 때마다 우리는 깊은 교류를 나눴다. 그는 자신이 재직 중인 불교 대학인 동국대학교에서 강의를 해달라고 여러 번 부탁했다. 하지만 이미 고령에 접어든 나는 늘 그의 요청을 완곡히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박 교수는 하나의 ‘묘책’을 떠올렸다. 주변에 연락을 돌려 학술회의를 기획한 것이다. 나를 회의에 초청해 주제강연을 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고 겸사겸사 동국대학교도 방문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나는 그의 호의를 흔쾌히 받아들이며 내 오랜 친구인 이장우 교수도 회의에 초대해 상봉하게 해달라고 청했다.
2015년 11월 5일, 동국대를 방문한 필자(우측 네 번째)의 모습
회의는 서울의 유명한 세종호텔에서 열렸다. 이장우 교수는 기성학자들을 대표해 연사로 나선 자리에서 가슴 벅찬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저는 평생 여러 나라에서 온 많은 친구들을 사귀었지만, 여기 계시는 쑨창우 선생만큼은 늘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 부부는 이 교수의 말에 가슴이 뭉클했다.
당시 서울에서 8일을 머무는 동안 나는 서울의 중앙대, 승가대, 대구의 계명대에서 초청을 받아 강연을 하고 각 대학의 교·강사와 학생들과 교류했다. 박 교수는 우리 내외를 친절히 안내했고 국립박물관 불상 특별전시에도 초대했다. 중국 대륙과 중국 타이완을 포함해 전 세계 주요 박물관의 불상 소장품을 보며 나의 시야도 크게 넓혔다. 박 교수는 평소에도 공사가 다망한 분이지만 우리 부부가 한국에 있는 동안 매일같이 우리와 함께하고 손수 운전과 가이드와 마중, 배웅 등을 자처했다. 우리 부부는 그의 극진하고 융숭한 대접에 크게 감격했다.
다행히 좋은 소식 하나는 2016년 나의 선종 연구 성과 중 하나이자 중화서국(中華書局)에서 출판된 <선종 15강>이‘올해의 좋은 책 톱 10’에 선정됐고 중국국가사회과학기금이 지원하는 외국어 번역 사업 대상에도 추천됐다는 점이다. 박 교수의 연구팀은 탄탄한 학문적 기반을 바탕으로 한국어판 번역 출간 승인을 받아 현재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다. 내 저술이 한국에 소개되어 무척 기쁘게 생각한다. 이것은 이제까지 한국의 학계 동료들로부터 받은 진심 어린 배려에 대한 작은 보답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에 머물렀던 1년 동안 이 나라가 중국과 오랫동안 이어온 우정, 민족문화의 깊은 저력, 유구한 역사를 지닌 전통 의례와 풍습, 교육을 중시하고 스승을 존경하는 국민들의 태도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중에서도 한국의 벗들이 내게 베풀어준 배려와 우정은 영원토록 잊지 못할 것이다.
글|쑨창우(孫昌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