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2-28 글|이재호(아주일보 베이징 특파원)
고등학교 시절부터 뇌리에 남아 있는 이야기 한 토막. 중국 전국시대의 사상가 장자(莊子)는 어느 날 꿈속에서 나비로 변해 꽃 사이를 오가며 노닐었다. 그러다 잠에서 깬 장자는 문득 궁금해졌다. “내가 나비가 되는 꿈을 꾼 것인가. 아니면 나비가 꿈에서 나로 변했던 것인가.” 현실과 꿈속 세계가 구분이 안 되는, 그래서 나와 천지 사물은 결국 한 몸이라는 뜻의 ‘호접몽(胡蝶夢)’ 고사다. 인생의 덧없음에 대한 비유로도 쓰인다. 학업 스트레스가 심했던 때라 “그래 시험 성적이 뭐가 중요해, 다 덧없는 일인데”라며 이 고사 내용을 유치하게 떠들고 다닌 기억이 난다.
한동안 잊고 지내던 호접몽 고사가 최근 유독 자주 떠오른다. 정보통신기술(ICT) 발달에 힘입어 현실과 가상의 구분이 사라지는, 더 나아가 현실과 가상이 하나로 융합되는 일이 실제로 가능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전 세계가 현실과 가상 세계를 연결하는 확장된 공간 ‘메타버스(Metaverse)’에 열광하고 있다. ‘가상’ 혹은 ‘초월’이라는 의미의 메타(Meta)와 우주를 뜻하는 유니버스(Universe)의 합성어다. 가상현실(VR), 증강현실(AR), 혼합현실(MR) 등 ICT 기술을 활용해 현실 세계와 비숫한 사회·경제·문화 경험을 제공한다. 메타버스에서 활동하는 실제 개인의 아바타들은 사무실에 모여 회의를 하거나, 퇴근 후 장을 보고, 함께 스포츠를 즐길 수도 있다. 5G 상용화 등 비약적인 기술 발전과 더불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비대면·온라인 추세가 확산하면서 뉴노멀 시대를 선도할 아이템으로 평가 받는다. 세계 최대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 기업인 페이스북이 직접 나서 사명을 ‘메타’로 변경할 정도로 시장의 관심이 뜨거운 이유다.
메타버스의 중국식 표현을 찾아보니 ‘위안위저우(元宇宙)’다. 중국인 친구가 처음 이 어휘를 언급했을 때 무슨 뜻인지 몰라 창피를 당한 적이 있다. 기술 강국인 중국 역시 메타버스에 주목할 게 당연한데도 말이다. 실제로 내로라하는 중국 기업들이 메타버스 관련 투자에 박차를 가하는 중이다. 특히 소셜미디어인 더우인(抖音)을 운영하는 바이트댄스가 적극적이다. 중국 1위 VR 헤드셋 제조업체 피코를 인수하는 등 중국 내 메타버스 투자 열기를 주도하고 있다. 알리바바(阿里巴巴)와 같은 전자상거래 업체도 메타버스 기술을 적용하는데 힘을 쏟는 모습이다. 예컨대 메타버스 내 쇼핑 공간에서 AR로 구현된 옷을 입어보고 마음에 드는 상품을 구매하면 현실 세계의 집으로 배달이 되는 식이다. 중국 최대 게임사 텅쉰(騰訊)의 경우 메타버스 선두 업체인 미국 샌드박스와 에픽게임에 상당한 투자를 해놓은 상태다. 텅쉰은 ‘왕자메타버스(王者元宇宙)’와 ‘천미메타버스(天美元宇宙)’ 등 메타버스가 포함된 상표권도 신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모든 현상에는 부작용도 있는 법. 메타버스 테마주에 대한 투자 열기가 과도해지자 여기저기서 경고의 목소리가 나온다. 중국 경제 매체인 증권시보(證券時報)는 메타버스라는 허황된 개념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다가는 결국 자신의 ‘돈주머니’만 털릴 수 있다고 경고했다. 또한 상하이(上海)증권거래소는 메타버스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상장사에 관련 내용을 공개하라는 공문을 전달하기도 했다.
다만 글로벌 화두로 떠오른 메타버스 열기가 쉽사리 식지는 않을 것이다. 코로나19 종식 이후에도 우리 삶 속에 더 깊숙이 자리잡게 될 공산이 크다. 이제 ‘위드 코로나’와 함께 ‘위드 메타버스’를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할 때다.
글|이재호(아주일보 베이징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