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링촌사구 앞 중심광장에서 장위뱌오 사구당위원회 서기와 촌민들이 장웨이지 전 서기를 둘러싸고 과거 그의 창업 스토리를 듣고있다. 사진/천젠(陳建)
선전(深圳)에서 개혁개방이 가져온 변화를 실감하려면 사람들은 모두 룽강(龍崗)구 난완제다오(南灣街道)의 난링(南嶺)촌에 가보라고 권유한다. 선전시 중부에 위치한 난링촌은 4㎢ 면적의 작은 산촌이었다. 그러나 이곳은 지난 40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가난하고 낙후된 영남(嶺南)의 작은 마을에서 공동 고정자산 35억 위안, 마을주민 1인당 연평균소득 15만 위안의 현대화된 경제단위로 탈바꿈했다. 이런 눈부신 성과 뒤에는 장웨이지(張偉基)와 장위뱌오(張育彪)라는 아버지와 아들이 있다.
장웨이지 난링촌 전 당지부 서기(오른쪽)와 장위뱌오 난링촌사구 당위원회 서기 사진/천젠(陳建)
‘가난 탈출’을 위한 혼신의 노력
난링촌 제1생산대 대장이었던 장웨이지는 올해 73세로, 키는 작지만 걸음이 매우 빠르다. 이는 엄격하고 빠른 그의 업무 스타일과 비슷하다. 1960년대부터 그는 난링촌 촌간부로 일했다.
개혁개방 전 난링촌 촌민은 생산은 대출에 의지하고, 생활은 정부 지원에 의지했다. 가난한 마을의 사정을 파악한 그는 ‘궁하면 변화를 꾀한다’고 마을 사람들과 부업을 하기 시작했다. 얼마 뒤 제1생산대 소속 가정들은 생활이 개선됐고 자전거를 산 집도 있었다. 그러나 장웨이지는 ‘자본주의 노선’을 걷는다는 이유로 오히려 상부의 질책을 받았다.
그렇다고 물러날 장웨이지가 아니었다. 그는 마을 주민들을 가난에서 벗어나게 하겠다는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 개혁개방 정책이 시행돼 그와 촌민들에겐 희망이 생겼다. 134가구, 총 576명을 4개 생산대로 나누어 ‘부유해지기 위한’ 첫 발걸음을 시작했다. 농사용 소 20여 마리, 탈곡기 10여 대, 소형 식량 가공공장 1곳, 흙벽돌로 만든 식당 몇 곳을 개조해 만든 생산대 창고, 이것이 개혁개방 전 난링촌의 전재산이었다. 농업만으로는 발전할 수 없었을 테지만, 난링촌에는 유휴토지가 있었기 때문에 장웨이지는 자본을 도입해 공장을 짓는 일에 힘을 쏟았다.
1980년 초, 장웨이지가 백방으로 노력한 끝에 난링촌은 외지의 한 전자공장과 협력해 공장 건설을 준비했다. 그러나 상부에 협력 보고서 심사를 올렸지만 결재가 떨어지지 않았다. 장웨이지는 심사 책임자를 붙잡고 늘어졌다. 집에서 사무실까지 책임자를 쫓아다니며 “결재해줄 때까지 절대 돌아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결국 책임자는 “당신 정말 대단하다”며 결제서류에 도장을 찍고말았다. 선전 최초로 현지와 외지가 공동으로 창립한 기업이 이렇게 탄생했다.
첫 홍콩기업을 유치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당시 선전시 바오안(寶安)구에는 사업 기회를 찾기 위해 들어온 홍콩 사업가가 많았다. 홍콩 사업가들이 묵는 호텔을 알아낸 장웨이지는 외부 연락을 맡은 촌간부 2명과 호텔 밖에서 하루 종일 ‘죽치고’ 있었다. 그러다 홍콩 사업가를 만나면 바로 달려가 인사하고 마을을 소개하면서 시찰하고 투자하라고 설득했다. 이렇게 한번 출장을 나가면 두달 넘게 걸렸다. 그들의 소개에 난링촌을 방문해 시찰하는 사람은 있었지만 투자를 결정하진 않았다. 당시 난링촌은 정말 너무 가난해 포장도로가 하나도 없었고, 물과 전기 같은 공장 설립에 꼭 필요한 기반시설도 전무했었다.
홍콩 사업가를 유치하기 위해 장웨이지는 촌간부, 촌민과 함께 환경을 정비하기 시작했다. 산에서 흙을 옮겨와 노반을 평평하게 다지고 길을 만들었다. 나무를 심고 마을 외관을 정비했다. “나중에 난링촌을 방문한 홍콩 사업가들은 가난하긴 하지만 깨끗하게 정비된 마을 모습에 협력을 결정했다.” 어려웠던 당시 상황을 떠올리며 장웨이지는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한 곳이 투자를 결정하자 곧 다음 투자자로 이어졌다. 1987년 난링촌은 첫 번째 공업단지를 조성해 외지 기업 14곳을 입주시켰다. 당시 마을의 전체 고정자산은 530만 위안에 달했고, 촌민 대다수가 공장에서 근무해 기업 직원이 됐다. 공장은 하루 8시간 근무제를 시행했고, 촌민은 매월 말 월급을 받아 도시민과 차이가 별로 없었다.
난링촌사구 당췬서비스센터에서 혁명노구(老區)의 촌당지부 서기들이 난링촌사구 츠푸쓰위안(致富思源)전시관을 참관하면서 장위뱌오 서기의 난링촌사구 당 건설 경험과 경제 전환 상황을 들었다. 사진/천젠(陳建)
주민을 ‘창업의 길’로 이끌다
난링촌에서 취재진은 전 서기에 대한 존경심을 어디서나 느낄 수 있었다. 그를 왜 그렇게 신뢰하느냐는 질문에 촌민들은 “그와 함께 일하고 싶어서”라고 입을 모았다.
1982년 난링촌에는 생산대가 4개 있었고 장웨이지는 제1생산대 대장이었다. 처음으로 토지 보상금 43만 위안을 받자 오랫동안 가난했던 촌민들은 이 돈을 나눠서 생활을 개선하길 바랐다. 그러나 장웨이지는 공동경제는 암탉 같아서 잘 키워야 더 많은 알을 낳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한 푼도 나눠갖지 않고 돈을 모아 마을 발전에 쓰기로 했다. 사실 당시 제1생산대 35명의 노동력 가운데 장웨이지 가족은 12명이었다. 돈을 나누면 그들은 10여 만 위안은 받을 수 있었다. 이 사실을 알았던 촌민들은 장웨이지가 돈을 받지 않자 생각을 바꾸기 시작했고 보상금으로 공장을 지어 생산력을 높이는 것에 찬성했다.
1983년 상부는 난링의 4개 생산대 합병을 건의했고, 촌민 모두 장웨이지가 맡아서 일하길 바랐다. 이때 장웨이지는 다시 제1생산대의 자산을 공유화해 마을 전체의 자산으로 삼자고 제안했다. 이렇게 해야 함께 부유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제1생산대 사람 중 일부는 이의를 제기했지만, 장웨이지는 한 명씩 모두 만나 설득했다. 같은 해 7월, 합병에 모두가 최종 합의했다. 무기명 투표 방식으로 촌민 모두가 한 표씩 행사한 투표를 통해 장웨이지는 촌당지부 서기 겸 촌민위원회 주임으로 선출됐다. 이때부터 난링촌은 4개 생산대에서 하나의 촌으로 공식 통합됐고 장웨이지는 난링촌의 ‘리더’가 됐다. 바로 이날 장웨이지는 촌민에게 4가지 약속을 했다. 첫째 배부르게 먹게 하고, 둘째 새로운 집에서 살게 하며, 셋째 쓸 돈을 벌게 하고, 넷째 건강하고 장수하게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35년 뒤 취재진이 당시 그가 한 4개 약속을 언급하자 장웨이지는 손가락을 꼽아가며 자기가 어떻게 했는지 설명해주었다. 그는 “한 말에 책임을 져야 사람들이 같이 일하려고 하지”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함께 일하는’ 것은 난링촌에서는 흔한 일이다. 폭우가 쏟아져 공장이 물에 잠기면 장웨이지가 앞장서 해결했다. 마을 외관을 정비하기 위해 촌 ‘양위(촌당지부 서기와 촌민위원회)’ 회원 가족 중 7명이 촌 청결대 환경미화원이 되어 적게는 10여 년, 많게는 20년 동안 일했다. 외지 노동자들이 하루 일을 마치고 뜨거운 물에 목욕하고, 난링촌에서 안심하고 일할 수 있도록 마을은 80년대부터 목욕탕을 마련했다. 장웨이지의 부인은 목욕탕에서 보일러공으로 일했다.
“아버지는 매우 강한 분이다. 아버지는 내게 인간의 도리와 일하는 방법을 알려주셨다. 나는 아버지를 존경한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가 아니기 때문에 내 길을 가야 한다.” 장위뱌오는 인터뷰 내내 장웨이지 옆을 지키며 이따금 취재진에게 아버지이자 옛 상사의 객가어를 취재진에게 ‘통역’해주었다.
현재 장위뱌오는 난링촌사구(社區) 당위원회 서기이자 난링촌사구 주민위원회 주임이다. 장위뱌오는 난링촌에서 나고자란 토박이이다. 그의 일가는 벌써 25대째 이곳에서 살고 있다. 그는 어린시절부터 아버지가 촌민을 이끌고 가난과 싸우는 것을 직접 보고 자랐다. 아버지 세대의 근면함과 고난을 직접 봤기 때문에 이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안다.
“솔직히 말해 이 일은 내가 제일 하고 싶었던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일단 시작한 만큼 그만둘 수 없다. 장거리 경주에 나간 선수처럼 중도에 포기할 수 없다.”
1994년 대학원을 졸업한 장위뱌오는 마을로 돌아와 아버지처럼 공청단 촌지부 서기부터 시작했다. 화난(華南)이공대학교에서 관리학 석사학위를 받은 장위뱌오는 이 일을 하면서 압박감이 컸다고 말했다.“아버지 덕을 봤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래서 그들에게 내 가치를 증명해야 했다.”
1990년대 초부터 난링촌은 새로운 창업을 시작했다. 그들은 9000여 만 위안을 투자해 황진위안(黃金園)공업단지를 건설해 외자기업 8곳을 유치했다. 이 공업단지는 매년 마을에 1000-2000만 위안의 수입을 가져다주었다. 이로써 주민 1인당 평균 2만 위안의 소득이 증가됐다. 장위뱌오가 직면한 현실은 ‘아무 것도 없는 상태’가 아니라 난링촌의 ‘영광을 재현’하는 것이었다.
‘영광 재현’은 경제 발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선전시는 2004년부터 농촌 도시화를 일괄적으로 추진했고, 난링촌은 촌에서 사구로 전환돼 사구주식협력회사를 설립했다. 2006년 난링촌에 사구 당위원회가 설립됐고, 이는 선전시 최초로 ‘촌개거(村改居, 촌민 호적을 주민 호적으로 변경)’한 사구 당위원회였다. 당시 난링촌에는 현지인 1000명, 호적 인구 6000여 명, 상주인구 8만명이 있었다. 당위원회 서기이자 주민위원회 주임이었던 장위뱌오에겐 안정적이고 행복한 생활을 보장하고, 행복하고 살기 좋은 현대화된 사구를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였다.
최근 장위뱌오와 그의 동료들은 혁신을 통한 난링촌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2017년 난링촌은 3억 위안을 투자해 선전시 최초로 사구주식회사 창투기금을 설립하고, 미래지향적이고 혁신적이며 성장 가능성이 높은 혁신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전 서기인 장웨이지는 이를 반대했다. 리스크가 너무 크고, 일부 신산업은 효과가 너무 느리게 나타났기 때문에 ‘임대 수입’이 더 안정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낙후된 생산력을 정리하기 위해 난링촌은 한 기업과 계약을 사전 종료하고 2000만 위안의 위약금을 지불했다. 장웨이지는 이것도 반대했다. 다년간 난링촌에 입주했던 기업이 계약 만료기간이 다가와 임대료 인상이 부담스럽다면 사정을 감안해 임대료를 낮춰줄 수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반면 장위뱌오는 시장법칙에 따라 협상해 해결하는 쪽을 택했다. “아버지가 입주시킨 기업이라 그 마음은 이해하지만 우리는 과거의 규칙에 따를 수 없었다. 우리는 새로운 시장법칙에 따라 일을 처리해야 한다. 또한 주도권을 쥐어야지 더이상 수동적인 자세로 기업을 유치해선 안 된다.”
장위뱌오는 아버지의 잔소리가 너무 심해 집에 가기 싫을 때도 가끔 있다고 웃으며 말했다. 한번은 부자의 의견이 정말 안 맞아 장위뱌오는 아버지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쓰기도 했다. ‘개혁개방이 진행된지 벌써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아버지 세대는 대담하게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었고, 다른 사람보다 먼저 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과거 그렇게 어려운 상황에서도 아버지 세대는 다 했는데 우리가 못 할 이유가 없습니다. 아버지가 수십 년 동안 가르친 가치관을 이제와서 막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그 가치관이란 ‘공공심’이다. 책임지는 것이고 어려움 앞에서 물러나지 않고 무너지지 않는 것이다. 세대가 다른 두 사람은 발전 철학은 다르지만 이 가치관은 이어졌다.
몇 년 전, 난링촌 주주총회에서 장위뱌오는 3년 안에 전환에 실패하면 사직하겠다는 서약서를 썼다. “나는 우리 난링촌의 공동경제를 현대화된 경제 단위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나는 책임지는 것이 두렵지 않다.” 과거 아버지처럼 촌민은 선거로 이 새로운 지도자에게 신뢰를 표했다. 주주총회에서 주주들은 신임표를 던졌고 이로써 난링촌은 새로운 노정을 시작했다.
장위뱌오는 베이징 중관촌(中關村) 창업거리에서 ‘경험’을 배웠다. 칭화치디(淸華啓迪), 중산(中山)대학교 ‘천인계획(千人計劃)’ 전문팀과 협력해 과학기술단지, 디자인연구원을 설립해 이제 주요 소득을 임대료가 아닌 지분을 통해 얻게 됐다. 난링촌은 과학기술단지를 건설하고 ‘난링주식투자기금관리공사(南嶺股權投資基金管理公司)’를 설립해 인공지능, 전자정보, 생명과학, 신에너지, 신소재 등을 핵심 분야로 확정하고 수십 개 첨단과학팀을 유치했다. 중산대학교 생명과학학원 지도교수이자 국가 ‘천인계획’ 전문가 룽이캉(容益康) 교수가 이끄는 ‘캉티성밍(康體生命)’ R&D팀도 그중 하나다. 난링촌 1983크리에이티브타운(南嶺村1983創意小鎭)에 입주한 8개월 동안 ‘캉티성밍’은 국산 녹색형광단백질(GFP) 항체를 국내 최초로 개발해 중국 실험과학 분야의 중요한 원재료 공백을 메꿨다.
“과거 우리는 농사짓고 살다가 나중에는 땅을 빌려주고 수익을 얻었다. 이제 우리는 첨단과학기술산업 육성으로 부를 축적해야 한다. 나는 첨단과학기술기업 한두 곳만 잘 양성하면 언젠가 난링촌 촌민과 함께 증권거래소에서 상장을 알리는 종을 울릴 수 있다고 확신한다.”
난링촌사구 당췬서비스센터에서 주민들이 에어로빅을 하고 있다. 사진/천젠(陳建)
우리의 최종업무는 ‘서비스 지상주의’
“우리의 최종 업무는 서비스다. 신념만 있으면 해결 못할 일이 없다.” 장위뱌오는 이렇게 말했다. 사구 당위원회 서기와 주민위원회 주임을 겸하고 있는 그는 아침 일찍 출근해 매일 바쁜 하루를 보낸다.
난링촌 당지부(당위원회) 당원들은 매일 저녁 8시 30분에서 11시 30분까지 당직을 서면서 사구와 주민들의 문제 해결을 돕는다. 장위뱌오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일주일에 두번씩 당직을 선다.
장위뱌오는 난링촌사구 당췬(黨群, 당원과 군중)서비스센터를 날마다 둘러본다. 난링촌 중심에 위치한 난링촌사구 당췬서비스센터는 현재 선전시에서 규모가 제일 크고 기능이 가장 잘 갖춰진 센터다. 주민서비스홀, 당췬업무부, 24시간 셀프도서관, 사구U스테이션, 화합촉진회, 노인대학, 사구학당, 여성·아동의 집 등이 마련돼 있으며, 40여 개 공익서비스 프로젝트를 제공하고 있다. 관할지역 주민은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난링에는 ‘난링에 오면 다 난링 사람’이라는 인상적인 말이 있다. 난린촌사구의 서비스 대상은 현지 원주민뿐 아니라 수만 명의 외지인도 포함된다.
“아버지 때부터 우리의 서비스 대상은 현지인과 외지인의 구별이 없었다.” 장위뱌오는 이렇게 소개했다. 과거 외지 노동자들이 안심하고 일할 수 있도록 난링촌은 모든 입주기업에 상주 공장장을 배치하고 외지 노동자의 수요를 즉시 파악해 해결했다. 설이나 명절에 귀향하지 못한 노동자에게는 뷔페를 제공했다. 난링촌은 또한 촌 운영 병원을 설립해 외지 노동자가 2위안만 내면 통합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게 했다.
“과거 노동자와 기업간 노사분쟁이 발생하면 아버지는 외지 노동자의 권익을 지켜주어 노동자들에게 큰 신망을 얻었다.” 하지만 지금은 방대하고 현대화된 사구 관리에 개인의 신망만으론 역부족이기 때문에 장위뱌오는 전문 인재를 선택했다.
현재 장위뱌오의 보좌관은 사회복지를 전공한 인재다. 장위뱌오는 그가 일을 잘하고 사람들과 소통을 잘한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에게 사구 일을 주관하도록 했다. “인재 존중, 이것은 아버지도 늘 해오던 일이다.”
소매상의 거리 점거 운영 처리에서 위법 건축물 철거와 환경 관리까지, 빠른 도시화로 사구에는 해결해야 할 문제가 끊이지 않고있다. “우리가 보기엔 작은 일 같지만 주민에겐 큰 일이기 때문에 진지하게 대해야 한다. 우리의 최종 업무는 서비스다. 이런 신념만 있으면 해결 못 할 일이 없다.”
난링촌사구 당췬서비스센터 1층 서비스홀 정면에는 ‘아름다운 생활에 대한 인민의 바람이 바로 우리의 분투 목표(人民對美好生活的向往, 就是我們的奮鬥目標)’라는 글귀가 눈에 띄는 붉은색으로 써 있다.
“시진핑(習近平) 총서기가 텔레비전에서 이 말을 한 다음 날, 아버지가 우리에게 이 말을 새겨두라고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