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8월 2일, 중난산 원사가 광저우의과대학 부속 제1병원 진료실에서 X레이 영상을 확인하고 있다. 사진/ XINHUA
위험하고 험난한 의료전선에서 고군분투하며 환자들에게 건강 회복의 희망을 전달하고 있는 중국의 많은 의사들. 유명 호흡기질환 전문가이자 중국공정원 원사인 중난산(鐘南山)은 그 중 한 사람이다.
올해 83세의 중난산은 임상치료를 하면서 정밀한 기술과 의사로서의 높은 도덕성으로 동료와 환자들로부터 큰 존경을 받고 있다. 2003년 ‘사스(SARS)’와의 전쟁이 벌어지자 그는 위급 중환자 치료를 자청한 것은 물론 의료방안을 마련하는 데 모든 정력을 쏟았다. 의사로서의 뛰어난 의술과 인정으로 숱한 생명을 구함으로써 의학자가 가져야 할 진지한 태도와 높은 수준의 책임감을 보여주었던 그다. 2018년 있었던 중국 개혁개방 40주년 경축 대회에서 중난산은 중국 공중보건사업 긴급체계 건설이라는 걸출한 기여를 인정받아 ‘개혁선봉’의 호칭을 얻었다. 여든을 넘긴 나이에도 매주 진료를 하며 환자 치료에 온 힘을 쏟고 있는 그는 스스로의 성과에 대한 질문에 쑥스러운 듯 대답했다. “나는 병을 치료하는 의사일 뿐이다.”
출생과 함께 정해진 ‘의사의 길’
중난산은 의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광둥(廣東)성 인민(人民)병원 제2대 원장이자 중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호흡기질환 전문가인 중스판(鐘世藩)이 그의 부친이고, 어머니는 고급 간호학을 전공한 뒤 환자들에게 남다른 애정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모님의 영향으로 점차 의학에 관심을 갖게 된 중난산이었다.
중난산이 어렸을 때, 미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아버지는 일본 B형 뇌염 바이러스 배양 및 분리를 연구했으며, 이를 위해 종종 자신의 월급으로 흰쥐를 사 와 집 서재에서 실험하곤 했다. 이 일은 중난산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는 스스로 ‘흰쥐 사육사’를 자처하였고, 이를 계기로 가장 기초적인 의학 및 의료 지식을 접하게 되었다.
1960년 베이징(北京)의과대학(베이징대학 의학부의 전신)을 졸업한 뒤에는 학교에 남아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후 1971년 광저우(廣州)시 제4인민병원(광저우의학원 제1부속병원의 전신)으로 발령받았다. 중난산은 아버지의 삶을 통해 의사에게 필요한 것들을 보았다. 특히, 수십 년간 쌓았던 임상실험의 경험을 후배들에게 물려주기 위해 75세의 고령에다가 안과 질환을 앓고 있었던 부친이 한쪽 눈을 가린 채로 40만 자에 달하는 <소아과질병 감별진단>을 썼던 일은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는 그렇게 아버지처럼 병을 치료하고 사람을 구하는 좋은 의사가 되겠노라 다짐했다.
2019년 5월 8일 오후, 광저우 위생직업기술학원 5·12 국제 간호사의 날 겸 졸업식이 바이윈(白雲)캠퍼스 교직원·학생 활동센터에서 열렸다. 중난산 원사가 간호학과 학생들에게 제비꼬리 모자를 씌워주고 있다. 사진/ IC
유학생활 중 보여준 ‘패기’
개혁개방 얼마 뒤 중난산에게 학문의 깊이를 더할 기회가 찾아왔다. 1979년 시험을 거쳐 국비지원 해외유학 자격을 얻은 그는 영국 에든버러대학교 부속 로얄 인퍼머리 병원에서 연수를 하는 것으로 2년여의 유학생활을 시작했다.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간이었지만 고향을 떠나 꿈에 다가가기 위한 첫 걸음이었다고 중난산은 회상했다.
영국에 도착한 중난산은 자신의 지도교수 데이비드 플래너리 교수에게 편지를 한 통 썼다. 영국의 저명한 만성질환 전문가인 플래너리 교수에게 만난 적은 없지만 매우 존경하고 있다는 뜻을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답장이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한 달이 더 지났을 때의 일이다. 플래너리 교수는 편지에서 ‘지금의 영국 법률은 중국 의사의 자격은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학생은 병원에서 연수를 할 때 단독으로 진료를 할 수 없으며, 관찰자 자격으로 실험실 혹은 병실을 참관하는 것만 허락한다’고 했다.
플래너리 교수의 편지는 비수가 되어 중난산의 가슴에 꽂혔다.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지도교수가 이렇게 찬물을 끼얹을 것이라곤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심지어 그와 같은 냉대는 한번에 그치지 않았다.
에든버러대학교의 기관지 내시경실에서 영국 주임 교수가 검사하는 것을 참관할 때의 일이다. 교수는 중난산을 지명해 물었다. “학생의 나라에도 이러한 설비가 있습니까?” 중난산은 겸손하게 대답했다. “있습니다.” 교수는 검사를 이어가면서 자부심 어린 얼굴로 중난산을 향해 말했다. “나는 벌써 300건 넘게 검사를 하고 있습니다.”
중난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1500건 넘게 검사를 했다는 사실을 말해줘 봤자 주임 교수를 비롯한 사람들은 믿지 않을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중국인을 얕잡아보게 놔둘 수는 없어. 일을 저질러서 저들에게 보여줘야 해!” 그 당시 중난산이 마음 속에 품은 생각이었다.
이후 중난산은 에든버러대학교 부속 로얄 인퍼머리 병원에서 쉼 없는 노력과 재능, 식견을 보여주며 점차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그때 중난산은 난이도가 매우 높은 실험을 진행 중이었다. 일산화탄소가 인체 헤모글로빈 해리곡선에 미치는 영향을 측정하는 실험이었다. 직접 증거를 얻기 위해 그는 자신의 몸을 실험도구로 사용하기로 했다. 동료들로 하여금 자신에게 일산화탄소를 흡입시키도록 한 뒤 흡입량에 따라 수시로 채혈을 하여 검사하도록 한 것이다.
인체 혈액 중 일산화탄소 농도가 15%에 달하는 것은 담배를 50-60개비를 연속해서 폈을 때나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중난산은 위험을 무릅쓰고 일산화탄소를 혈중 농도 22%에 달할 때까지 흡입했고, 흡연 경험이 전무했던 그는 현기증을 느낄 정도였다. 결국 그의 열정 덕에 실험은 모든 이가 만족할 만한 결과를 거두었다.
영국에서의 유학 기간 동안 그가 많은 이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는 권위에 도전한 일 때문이었다. 마취과의 트루먼 교수는 중난산에게 옥스퍼드대학 존 래드클리프 병원의 마취과 주임 컬 교수의 연구를 반복하도록 했다. 문제는 중난산이 여러 번 실험해도 다른 결과가 나왔고, 때문에 컬 교수의 결론이 정확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중난산의 실험 결과를 신뢰했던 트루먼 교수는 새로운 실험 결과를 마취학회에 알리도록 했다.
1980년 영국 마취학회가 캠브리지대학교에서 열렸다. 학회 회원들 대부분이 마취의학 영역의 권위자들이었다. 중난산의 실험 보고가 학회 발언의 첫 순서가 되었다. 중난산은 자신의 발표가 권위자에 도전하는 것임을, 심지어 완전히 상반되는 결론을 내놓는 것인 만큼 치열한 논쟁이 벌어질 것임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실험 결과 발표를 마친 뒤, 영국의 모든 전문가들은 연단에 선 중국 의사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고, 그의 결론에 동의한다는 의미로 두 손을 치켜들기까지 했다. 그의 실험 보고서는 나중에 1983년 영국 마취학 잡지에 게재되었다.
1981년 11월, 중난산은 2년여간 머물렀던 영국을 떠나게 된다. 유학 기간 중 그는 호흡기질환 분야에서 6개의 중요한 성과를 냈고, 7편의 학술논문을 완성했다. 귀국한 그에게 플래너리 교수로부터 짧은 메시지가 도착했다. 2년 전과 달리 최고의 칭찬이 담긴 편지였다. “학자 생애에 많은 나라의 학자들과 협력했지만, 솔직히 말해 중 선생처럼 근면하고, 좋은 협력을 끌어내며, 이토록 탁월한 성과를 낸 학자는 본 적이 없습니다.”
2003년 8월 4일 광저우시의학원 제1병원에서 당시 마완치(馬萬祺) 전국정치협상회의 부주석이 중난산 원사에게 조각가 차오충언(曹崇恩)이 조각한 동상을 증정했다. 동상에는 ‘중난산 원사 무사봉헌(無私奉獻) 인자남산(仁者南山)’이라는 글과 함께 마완치 부주석의 인장이 조각되어 있다. 사진은 차오충언과 중난산이 동상 제막을 하는 모습 사진/IC
실사구시 정신으로 이겨낸 ‘사스’
영국에서 귀국한 이후 중난산은 줄곧 호흡기질환 연구 및 치료에 매진했다. 그러나 2003년 갑작스레 발병해 전 세계를 휩쓸었던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이른바 ‘사스’는 그의 이목을 사회 급성전염병 연구로 돌렸다.
2003년 1월 21일, 중난산은 광둥성 위생청으로부터 중산(中山)시 두 개 병원으로 가 ‘괴병(怪病)’을 조사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그는 허위안(河源)시에서 전원해 온 이상 증상의 폐렴 환자와 접촉하게 된다. 당시 환자는 고열과 마른 기침 증상을 보였고, 흉부 X레이 검사 결과 ‘백폐(白肺, 양쪽 폐의 미만성삼출성병변으로 음영이 폐 전체를 차지함)’ 현상이 나타났다. 어떤 항생제를 써도 효과가 없었다. 동시에 허위안시에서 보내온 소식에 따르면, 현지 병원에서 해당 환자를 치료했던 의료 인력 8명 모두 감염되어 환자와 같은 증상을 보인다고 했다. 이에 대한 중난산의 첫 번째 반응은 ‘심상치 않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듣기만 해도 얼굴색이 변한다는 ‘사스’였다.
2003년 봄, ‘사스’ 환자는 급증했다. 위기의 순간, 광둥성 ‘사스’ 의료구호전문가조 조장으로 부임한 중난산은 광둥성 위생청에 “중증 환자는 모두 내가 있는 이곳으로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누구의 지시에 따른 것도 아닌, 그의 자발적인 의지였다.
모든 이들이 ‘사스’를 두려워하며 피하고자 했던 그때, 중난산의 그 같은 말은 빠르게 중국 전역으로 퍼지면서 사람들에게 의사의 위대함을 다시금 각인시켰다. 그 당시 광저우시의 크고 작은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던 사스 의심 환자들은 모두 중난산을 찾았다. 그리고 요청만 있으면 어디로든 찾아갔던 중난산이었다.
중난산은 그해 춘제(春節) 연휴 기간 내내 사스와의 전쟁 속에서 눈코 뜰 새 없는 바쁜 시간을 보냈다. 폐암 말기에 사스에 감염된 환자를 구하기 위해 무려 38시간 연속 눈 한번 붙이지 못하면서 과로로 쓰러지기까지 했다. 병원 측에서 집에 돌아가 휴식을 취하라며 강제했지만, 이틀도 채 되지 않아 자신의 자리로 돌아온 그였다. “죽는 것이 두렵지 않은 게 아니라 버틸 만 했기 때문이다.” 그때 그의 나이 67세였다.
사스 유행 동안 중난산은 사람들에게 무한한 사랑을 가진 의사의 덕을 보여주었을 뿐 아니라 발병 원인에 대한 연구에도 남다른 기여를 했다. 최적의 치료방법을 찾기 위해 중난산은 밤낮으로 일을 쉬지 않은 것은 물론, 수많은 참고 자료를 기록했다. 사스 환자를 치료하던 전문가들에게 가장 어려웠던 것은 전에 없던 갑작스런 발병이었기에 참고할 만한 치료경험이 없다는 것이었다. 중난산은 야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몇 가지 방법을 테스트했는지, 기억조차 하기 힘들 정도다. 다만, 치료를 위한 몇 가지 돌파구를 찾았던 것은 선명하다. 첫째, 환자 폐의 음영이 계속해서 확대되고 산소량이 낮아질 때 시기적절하게 지속적 기도양압 조치를 취하면 환자의 산소 흡입량이 증가하고 증상을 효과적으로 개선할 수 있다는 것, 둘째, 환자에게 고열이 나타나고 폐의 염증이 악화할 때 피질호르몬을 적절하게 투입하면 폐포의 비특이성 염증을 효과적으로 완화할 수 있고 폐의 섬유화 병변을 억제할 수 있다는 것, 셋째, 환자에게 세균 감염이 계속 일어날 때 반드시 맞춤형 항생제를 써야 한다는 것 등이었다. 이 같은 조치들이 효과를 보이면서 많은 병원에서도 같은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으며, 훗날에는 ‘사스 치료의 경전’이 되었다.
수많은 임상연구를 거쳐 마련된 치료방안들은 광둥성 위생청에 보고되었다. 위생청은 즉각 전문가 토론을 조직한 뒤 토론을 거쳐 수정된 방안들을 <광둥성병원 사스환자치료 작업지침서>에 담았고, 이를 각지의 시·성 직속·부속 의료기관에 하달했다.
얼마 뒤 광둥성 위생청이 개최한 기자회견 현장에서 중난산은 “사스는 결코 두려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예방할 수 있고 치료할 수 있으며 통제할 수 있다”고 말하며 전 사회를 안심시켰다. 이에 대해 광둥성 정부는 “광저우의학원 제1부속병원은 사스와의 전쟁에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고, 중난산은 큰 공을 세웠다”며 높게 평가했다.
2003년 중난산은 CCTV 프로그램인 <감동중국>에 의해 <감동중국> 올해의 10대 인물 중 한 명으로 선발되었다. 당시 이 프로그램은 중난산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뜻밖에 닥친 사스 바이러스에 당신은 냉정하고 두려움 없이 맞섰습니다. 당신은 의사의 뛰어난 의술과 자애로운 마음으로 생명을 구했고, 과학자의 실사구시 정신으로 재난에 대응했습니다.” 중난산은 또한 같은 해 전국총공회가 수여하는 ‘5·1 노동훈장’을 받았으며, 광둥성 위원회 성 정부로부터 ‘사스 저항반격의 특등 공신’이라는 칭호를 얻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칭호보다 중난산을 더욱 기쁘게 한 것은 사스와의 전쟁을 계기로 중국 사회관리 및 공공서비스 부분의 ‘취약점’에 대해 정부가 반성했고, 중국 공중보건 긴급체제가 완비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실제 사스 발병 이후 긴급 발생한 공중보건사건에 대한 중국의 대처능력이 크게 향상되었다.
“사스 이후 달라진 점은 첫째, 질병예방 및 통제에 대한 정부의 투입이 크게 증가되었다는 것, 둘째, 정보공개 루트가 더욱 활성화하고 투명해졌다는 것, 셋째, 긴급대처방안 제정이 상시화됐다는 점이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는 2009년 중국이 전 세계적으로 발병한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A형을 성공적으로 통제한 것을 들 수 있다. 당시 최초의 환자는 멕시코에서 발생했다. 중국은 외부에서 발생한 바이러스에 대해 ‘외부에서의 유입을 차단하고 내부에서의 확산을 방지한다’는 방어전략을 신속히 세웠고, 일련의 방어방안은 빠르게 중앙에서 지방으로 전달되었다. 특히 백신 제작에 있어 중국은 신속하게 움직였다. A형 바이러스가 2009년 5월부터 발병하기 시작한 가운데 중국은 그해 9월 백신을 생산해 10월 출시했고, 1억 명이 넘는 환자들이 해당 백신을 접종했다. 이와 같은 메커니즘과 속도는 전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것이었다.
신 시기 공중보건 발전 이끈 선구자
공중보건 긴급메커니즘이 완비되어 가는 동안 중난산은 다시금 호흡기 만성질환 연구에 집중했다. 최근 그는 자신의 연구 계획을 세웠는데, 그 중 중요한 것 하나가 바로 만성 폐쇄성 폐질환에 대한 연구를 하는 것이다.
앞서 1999년 중난산은 만성 폐쇄성 폐질환에 대한 초기 연구를 진행했었다. 이후 10여 년의 노력 끝에 그의 연구팀은 역학 관점에서 바이오연료가 만성 폐쇄성 폐질환을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증명했다. 중난산의 주도로 23개 병원이 임상실험에 참여했고, 2008년 상용되는 저가 거담제 ‘카보시스테인’이 만성 폐쇄성 폐질환 발병률을 24.5% 낮춰주고 만성 폐질환 치료비 또한 85% 절감할 수 있음이 밝혀졌다. 이 연구 논문은 2009년 1월 24일 국제 정상급 의학잡지인 <엘스비어>에 게재되었으며, 최고 득표수로 ‘2008년도 최고의 논문’으로 선정되었다. 이는 중국 과학기술 종사자가 거둔 최초의 영광이었다.
중국 경제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공중보건사업에도 정책 지원이 잇따르고 있는 것은 중난산에게는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현재 중국의 기초의료보장 제도는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중병 대비 보험 및 의료구조 제도 또한 완비되고 있는 중이다.
2017년 중국공산당 제19차 전국대표대회 보고서는 ‘건강 중국전략을 실시하기 위해 의약위생체제 개혁 심화, 중국특색의 기초의료위생 제도와 의료보장 제도·양질 및 고효율의 의료위생 서비스 체계 전면 구축, 현대 병원관리 제도 완비를 요구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또한 ‘1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기간 동안 예방 위주와 건강촉진에 더욱 주력하고, 서비스 품질 및 수준 제고를 더욱 강조하여 질병 중심에서 건강 중심으로의 전환을 실현하고 인민 대중의 건강 수준을 눈에 띄게 제고한다는 점도 언급되었다.
중국 공중보건사업의 미래에 대해 중난산은 긍정적이었다. 그는 “19차 전국대표대회 보고서는 처음으로 ‘인민건강’을 민족 부흥과 국가부강의 중요 지표로 삼았다. 전과 달리 인민건강을 중요하게 바라보고 있다는 뜻이다”고 말했다. 중국 실정에 맞는 기계와 약물체계를 발전시키고 중국의 모든 환자들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자신의 바람이라는 중난산. 그의 바람은 이제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