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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장한 베이징 중축선, 그 아름다움을 찾아서


2024-02-18      

중국 고대 제왕의 권력과 문화의 상징인 고궁은 역사의 무게와 독특한 매력이 가득 있다. 사진/VCG


저녁에 북을 올리고 새벽에 종을 울린다는 ‘모고신종(暮鼓晨鐘)’을 책임지는 최북단의 종고루(鐘鼓樓)에서 ‘영원한 안정’을 뜻하는 최남단의 영정문(永定門)까지, 전체 길이 7.8km에 달하는 베이징(北京) 중축선은 도시의 중심축이 되어 수도의 랜드마크들을 연결하고 있다.


중국의 유명 건축가 량쓰청(梁思成)은 베이징 중축선을 “세계에서 제일 길고 가장 위대한 남북 중축선”이라고 평가했다. 베이징 중축선은 왜 위대하고, 매력은 무엇일까? 베이징 중축선의 매력과 위대함을 함께 알아보자.




역사 변천 속에서 거듭된 확장

서기 1267년,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가 중도(中都, 지금의 베이징, 1272년 대도(大都)로 개명)로 천도했다. 야심만만했던 쿠빌라이는 세상의 중심이 되는 미래를 꿈꾸며 도성 중심에 관한 계획을 시행했다. 쿠빌라이가 가장 신임했던 신하 유병충(劉秉忠)은 <주례·고공기(周禮·考工記)>에 기록된 옛 사람들이 생각한 이상적인 도성의 건설 규범을 엄격하게 준수해 중정(中正)과 대칭 구조의 도시를 설계했다. 원나라 대도의 중축선은 북쪽의 종고루에서 시작해 남쪽의 여정문(麗正門, 지금의 천안문(天安門), 톈안먼 근처)까지로, 성 전체를 관통하지는 않지만 이 도시의 영혼이 담겨있었다. 이후 명과 청 두 나라는 도시 질서와 중심(中)을 존중하는 공간 배치의 전통 철학을 이어받아 베이징의 중축선을 계속 연장하고 채우며 개선해 원나라 때 3.8km였던 길이는 7.8km까지 늘어났다.


마찬가지로 고대 수도였던 시안(西安), 항저우(杭州) 등의 도시와는 달리 베이징은 거의 지속적으로 수도였다. 금나라 때부터 원, 명, 청까지 중국 역사상 마지막 봉건왕조들이 이곳을 수도로 삼았다. 베이징의 중축선이 지금까지 남아있었던 이유는 역대 봉건왕조의 지속적인 도시 건설 덕분으로, 중축선은 도시의 역사와 발전의 증인이기도 하다.


신중국 성립 이후 기존의 베이징 중축선 위에 인민영웅기념비, 인민대회당 등 새로운 랜드마크가 건설됐고, 중축선을 따라 형성된 역사 유적지도 과거 황실 전용에서 일반인의 일상생활을 위한 것으로 기능에 큰 변화가 나타났다. 천단(天壇)과 태묘(太廟) 같은 제사 장소는 시민공원이 됐고, 자금성(紫禁城)은 고궁박물관으로 변신했으며, 과거 궁궐의 화원은 활짝 개방되어 전국에서 온 관광객을 맞이하는 등 베이징 중축선은 대중이 함께 즐기는 공공공간과 역사의 기억이 됐다.

베이징의 도시 건설이 계속되면서 중축선도 연장을 거듭했고 이 연장선 위에 대표적인 건축물들이 들어섰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개막식에서 ‘발자국’ 형상의 거대한 횃불이 영정문에서 출발해 고대 베이징의 중축선을 따라 국가체육장 ‘냐오차오(鳥巢)’를 향해 한 발 한 발 나아갔다. 북쪽으로 뻗은 베이징 중축선은 올림픽공원의 축선을 이루고 그 양쪽에 ‘냐오차오’와 국가수영센터인 ‘수이리팡(水立方)’이 자리잡았다. 둥근 냐오차오와 네모난 수이리팡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라는 고대 중국의 사상을 구현했다. 2022년 중국 국가판본관(版本館) 중앙본관이 중축선 북쪽 연장선에 있는 ‘산 좋고 물 맑은 곳’에 자리잡았다. 판본관은 역대 왕조의 희귀 판본을 보호하는 등 중화 전통문화의 정수를 집중적으로 전시하는 장소이다. 중축선은 750여 년 베이징의 사람과 사건을 연결해 중화 민족 문화 발전 성과를 살펴보고 느낄 수 있는 ‘살아 있는 박물관’이 됐다.


베이징 중축선은 중화 문명의 유구한 역사와 시대와 함께 발전하는 현대 베이징의 산 증인이다. 사진/VCG


조화와 균형의 장엄하고 아름다운 질서

징산(景山, 경산)공원에서 제일 높은 만춘정(萬春亭)에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보면 앞에서 뒤로 높낮이가 다양하고 운치 있는 건물이 늘어서 있고, 좌우 대칭으로 건물이 배치된 베이징 중축선만의 독특하고 장엄한 질서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우리의 조상들은 새처럼 하늘에서 대지를 내려다볼 수 없었음에도 풍부한 상상력과 고도의 공예 기술로 균형과 대칭, 구조적이고 장엄한 아름다운 구도를 만들어냈다.


중축선의 공간 배치는 먼 곳에서 온 외국인들도 감탄을 금치 못하게 했다. 실크로드를 따라 중국을 방문한 마르크 폴로는 원나라 때 대도에서 9년을 살았다. 마르크 폴로는 <동방견문록>에서 이탈리아 출신의 여행가가 본 수도에 대한 아름다움을 기록하면서 “도로가 직선으로 쭉 뻗어 있어 이쪽에서 저쪽이 보이고, 배치가 가지런해서 한쪽 문에서 거리 끝의 다른 문이 보인다”고 했다. ‘바둑판’ 같은 토지 계획에 심취한 마르크 폴로는 감탄을 금치 못하며 “아름다움의 극치라 말로 다 할 수 없다”고 찬탄했다.


중국의 도시 계획 철학은 3000여 년 전 주나라 때 이미 형성됐다. <주례·고공기>에 묘사된 이상적인 도시는 다음과 같다. 수도의 규모는 가로세로 정사각형으로 9리(里, 약 3.53km), 사면 성벽에는 문을 각각 3개 낸다. 도로는 가로 9개, 세로 9개를 내고, 황궁 왼쪽에는 종묘를, 오른쪽에는 사직을 배치하고, 앞에는 조정을, 뒤에는 시장을 둔다. 조상들이 생각한 이상적인 수도의 모습은 질서가 주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중화 민족의 철학을 보여준다.


“중국의 역대 유명 도시 중 <주례·고공기>를 잘 따라 건설된 도시는 많지 않다. 그러나 베이징은 고공기의 도시 건설 철학을 엄격하게 준수했다.” 량쓰청 건축가의 말처럼 베이징 특유의 장엄한 질서는 중축선 건설로 생긴 것이다. 베이징 중축선의 역사적 가치는 ‘눈에 보이는’ 축선에만 나타난 것이 아니라 질서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축선에 더 잘 나타나 있다. 한융(韓永) 전 수도박물관 관장의 말이다.


고궁(故宮)을 중심으로 베이징 중축선 남북에 있는 건물은 약에서 강으로 중요도에 따라 중심으로 갈수록 중요한 건물을 배치해 예의와 질서에 대한 존중을 표현했다. 중축선 양측에 있는 건물은 대부분 대칭으로 배치했다. 예를 들어, 고궁 동서 양쪽에는 조상에 제사를 지내는 태묘와 토지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직단(社稷壇)이 있다. 영정문 동서 양쪽에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천단(天壇)과 신농(神農)에게 제사를 지내는 선농단(先農壇)이 있다. 신중국 건국 이후 건설된 랜드마크 건물도 이 건축 미학을 따랐다. 1949년 개국대전(開國大典)에 사용된 국기 게양대도 중축선 위에 배치됐고, 톈안먼(天安門) 광장 오른쪽의 국가박물관과 서쪽의 인민대회당도 대칭 호응을 이뤄 하나는 과거 중화 민족의 찬란한 역사를, 다른 하나는 향후 신중국의 위대한 미래를 계획했다. 베이징 중축선은 대칭 미학의 정수라고 할 수 있다. 베이징 중축선의 대칭은 웅장함뿐 아니라 조화의 힘과 균형의 힘을 형성했다.


베이징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하계와 동계올림픽을 모두 개최한 도시로 중축선은 ‘두 개 올림픽을 개최한 도시’의 영광을 함께했다. 사진/VCG


산수 원림의 시적 정취

엄숙하고 장엄한 배치와 화려하고 아름다운 건물 외에 시적 정취가 가득한 산수 원림(園林)은 중축선에서 제일 생동감 넘치는 존재가 됐다. ‘엄숙하고 경건한’ 궁궐, 사원과 비교하면 고전 원림의 아름다움은 또 다른 매력을 발산한다. 건축물과 원림이 서로 어우러지면서 인문과 자연의 조화와 통일성을 이뤄냈다.


세상의 아름다운 경치를 한곳에 담아내는 일은 고대 중국 장인들이 잘하는 것이다. 자연의 산과 물을 본보기로 삼는 것에서 다른 곳의 인공 조경을 모방하는 것까지, 다시 중축선 근처에 집중시켜 아름다움을 강화해 베이징 황가 원림만의 독특함을 탄생시켰다. 중축선 위에 있는 영수궁(永壽宮) 화원과 경산이든, 그리고 중축선 밖의 원명원(圓明園)과 이화원(頤和園) 모두 그렇다.


고궁의 신무문(神武門)과 거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경산은 원, 명, 청 3대의 황가 화원인 어원(御苑)이었다. 경산은 자연적으로 형성된 산이 아니라 800여 년의 역사와 3대 황실이 대를 이어 만든 ‘인공산’이다. 원나라 때 이곳은 황제가 경치를 감상한 후원으로 칭산(青山)이라고 불렀다. 명나라 영락 연간, 명 성조 주체는 원나라 때의 황궁을 철거하고 그 터에 자금성을 건설했고, 옛 황성을 철거하면서 나온 흙과 새로운 해자를 파면서 나온 흙을 원나라 때 만들어진 칭산에 쌓았고 이름을 완쑤이산(萬歲山)이라고 이름 지었다. 청 순치 12년(1655년) 완쑤이산의 이름을 경산이라고 바꿨다. 청 고종 건륭 이후에는 경산을 대대적으로 확장해 산 정상에 오각정을 지었고 비로소 오늘날의 경산 구도를 갖췄다.


버려진 흙을 기술적으로 쌓아 올려 만든 경산은 중축선 위의 건물 배치의 단조로움을 보완했고, 베이징성을 더 아름답고 웅장하게 만들었으며, 중축선을 내려다볼 수 있는 최적의 장소를 만들었다. “경산은 후대 중국 원림 경관에 ‘호수를 파 산을 만드는’ 지혜를 주었고, 새로운 베이징 도시 건설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지금의 올림픽공원은 이 방법을 이용해 양산(仰山, 베이징올림픽삼림공원 내 가장 높은 곳)과 아오하이(奧海, 베이징올림픽삼림공원 내 호수) 등과 같은 생태 경관을 만들었다.” 리젠핑(李建平) 베이징사(史)연구회 회장은 이렇게 소개했다.


황실의 궁궐과 산수 원림을 하나로 결합한 것은 중국 고전 건축 미학의 기본 철학이다. 중축선 곳곳에 ‘봄에는 갖가지 꽃이 있고, 가을에는 달이 있으며, 여름에는 시원한 바람이 있고, 겨울에는 눈이 있다’는 고전 원림은 바로 이 철학을 가장 잘 실천한 것이다.


2023년 4월 2일, 베이징 톈탄공원을 방문한 여행객들 모습 사진/VCG


저력 지닌 문화의 척추

베이징 중축선은 탁월한 고대 건축 지혜를 드러낼 뿐 아니라 중화의 전통문화를 매우 풍부하게 품고 있다.


중축선 위의 건물들 이름에서 중국 유가사상의 정신을 느낄 수 있다. 태화전(太和殿), 중화전(中和殿), 보화전(保和殿)을 자금성의 3대전이라고 한다. 자금성 3대전은 봉건사회의 최고 통치자가 정무를 처리하고 성대한 의식을 거행한 곳으로 궁궐 건축군의 핵심으로 여겨진다. 3대전에 모두 들어가 있는 ‘화(和)’ 자에서 조화와 ‘화위귀(和為貴, 화해하고 조화를 이루는 것이 가장 귀하다)’를 바라고 ‘평화 사상’을 추구하는 철학을 볼 수 있다. 이 밖에 톈안먼의 이름은 <상서·중훼지고(尚書·仲虺之誥)>에서 따온 것으로 제왕은 반드시 하늘과 자연을 경외해야 통치 기반을 공고하게 다질 수 있다는 뜻이다. 지안문(地安門)의 이름은 <자치통감(資治通鑑)>의 ‘천평지안(天平地安)’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사회는 태평하고 화목하며, 백성은 행복하고 건강하다는 뜻이다.


베이징 중축선의 고 건축군은 또한 ‘천인합일(天人合一)’ 조화의 문화를 구현했다. 예를 들어, 각 고 건축물 지붕귀의 추녀마루에 수량이 다르게 잡상을 놓았다. 전설에 따르면 잡상은 하늘로 오르거나 바다로 들어갈 수 있고, 사악한 기운과 재해를 막을 수 있다고 한다. 추녀마루 제일 앞에서 길을 인도하는 것은 봉황을 타고 있는 신선 모형이다. 이것은 세상 만물이 신선의 지휘에 따라 하늘을 향하고 하늘과 융합하는 것처럼 보이며, 자연법칙에 순응해 일을 처리해 만물의 평안과 조화를 이룬다는 뜻이다. 또한 고 건축물의 처마는 보통 가운데서 양쪽으로 조금씩 올라가는 형태를 띠어 ‘반우(反宇)’라고 한다. 옛날 사람들은 ‘하늘(天)’은 볼록한 형태이고 양(陽)이라고 생각했다. 반우는 건물의 처마를 오목하게 해 볼록한 하늘 천우(天宇)와 음과 양을 절묘하게 융합시켰다. 지붕이 반우 형태로 하늘과 맞닿는 것을 고대 사람들은 하늘에 대한 경외라고 생각했다.


베이징 중축선은 중화 문화와 역사의 매개체이자 인류 공동의 자산이자 기억이다. 중축선은 원기가 충만한 대동맥처럼 옛 도시에 무한한 생명력을 제공하고 시민들의 다채롭고 풍부한 생활을 연결하며, 세계에 위대한 도성의 역사와 새롭고 아름다운 면모를 계속 보여주고 있다.

글 | 돤페이핑(段非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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