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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고대 미녀 ‘서시’와 한국과의 이야기


2022-08-31      



신라 설총의 <화왕계(花王戒)>는 한국에서 유명하다. 그중 서시가 오나라를 멸망시켰다는 ‘서시멸오(西施滅吳)’ 고사를 통해 국왕에게 향락에 빠지지 말라고 경고했다. 이는 신라시대에도 서시 이야기가 조선반도(한반도)에 전해졌다는 뜻이다.


서시는 중국 춘추시대 월나라 사람으로 중국 고대 4대 미인 중 한 명이다. 기원전 5세기 오나라에 패배한 월나라 왕 구천은 자신을 신하라 칭하며 미인 서시를 오나라 왕 부차에게 바쳤다. 서시에게 푹 빠진 부차는 국정을 등한시하고 결국 나라가 망했다. 중국 민간에는 서시 관련 전설이 매우 많다. 오나라가 멸망하자 서시는 월나라 대신 범려와 도망쳐 오호(五湖)에서 배를 타고 놀았다는 낭만적인 이야기가 전해진다. 서시완사(西施浣紗), 효빈서시(效顰西施) 등도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고려 시문의 서시 묘사

중국 서적이 고려에 계속 유입되면서 고려 문인들도 서시 이야기를 알게 됐다. 어느 날, 고려 예종은 궁궐에서 유신과 모란을 감상했다. 모란 중 ‘취서시(醉西施)’라는 품종은 중국에서 기원한 것으로 꽃은 분홍빛이 감도는 흰색에 가운데가 살짝 붉은 것이 마치 술에 취한 서시의 하얀 뺨에 홍조가 오른 것처럼 아름다웠다.


최자는 <보한집(補閑集)>에서 ‘취서시’를 ‘엄장양검취조균, 공도서시구일신. 소파오가유미족, 극래환욕뇌하인(嚴妝兩臉醉潮勻, 共道西施舊日身。笑破吳家猶未足, 郄來還欲惱何人)’이라고 묘사했다. ‘서시멸오’ 고사를 차용해 나라와 도시를 기울게 하는 모란의 매력을 표현했다. 이제현은 ‘송도팔경(松都八景)’ 중 하나인 서강의 풍경을 보고 ‘만목청산일선월, 풍류미필재서시(滿目青山一船月, 風流未必載西施)’라고 묘사했다. 이제현은 서강의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 미녀 서시가 옆에 없어도 충분히 풍류를 즐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고려 말기의 권신 신돈은 문신 유숙을 박해하려고 서시에 관한 유숙의 시문을 빌어 대대적으로 소동을 부렸다. 유숙이 스스로를 범려에, 공민왕을 월왕 구천에 비유했다는 것이다. 고사에서 범려가 구천을 떠나 서시를 데리고 배를 타고 도망갔듯이 유숙도 배를 타고 원나라로 도망갈 것이며 그렇게 되면 공민왕에게 불리하다는 것이다. 결국 유숙은 공민왕에게 죽음을 당했다. 이 이야기는 비극적 색채가 진하지만 다른 면에서 생각하면 고려 문인들이 서시 고사를 잘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고려 집권층이 그 안에 담긴 정치적 의미를 깨닫고 이용했다는 것을 뜻한다.


조선시대, 서시 이미지에 대한 사랑

조선시대에 이르러 서시 고사와 미인 이미지가 더 광범위하게 알려지게 됐다. 1411년 조선 태종과 그의 형 정종이 광연루에서 연꽃을 감상하며 연회를 즐겼다. 태종은 ‘반농반담신장염, 서자함교욕어시(半濃半淡新妝豔, 西子含嬌欲語時)’라는 시를 지었다. 연꽃이 반쯤 핀 모습이 서시가 말없이 수줍어하는 모습 같다는 뜻이지만 실은 형에게 경애심을 표현한 것으로, 말로 하기엔 수줍은 마음을 드러낸 것이다. 정종은 태종의 마음을 알았고 형제는 많은 말을 하지 않고 한밤까지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고 한다.


선조는 역사를 공부하다가 서시의 결말에 대해 물었다. 유희춘은 <오월춘추(吳越春秋)> 기록에 따르면 서시는 오나라가 멸망했을 때 이미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범려와 도망갔을 가능성은 없다고 말했다. 몇 백 년 뒤, 영조도 서시 고사에 흥미를 보였다. 대신 홍명한은 당나라 시인 나은(羅隱)의 <서시>라는 시를 빌려 사실 국가의 멸망과 서시는 무관하다고 설명했다. 몇 년 뒤에도 영조의 관심은 줄지 않아 대신들에게 범려가 서시를 데리고 도망간 것이 ‘정말 이상하다’고 말했다. 근대 들어 대신 남규희는 고종에게 중국 지리를 설명하면서 오나라 지방을 ‘천하화려지, 이부차, 서시지유허야(天下華麗地, 而夫差, 西施之遺墟也)’라고 했다. 이로써 조선반도에서 서시의 인기가 오래도록 계속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 재미있는 것은 <조선왕조실록>에 기녀의 이름이 기록된 경우가 있는데 이름이 ‘서시’인 기녀가 많았다는 점이다. 세종 시기, ‘소서시(笑西施)’라는 관기가 명나라 사신 조량(趙亮)의 눈에 들어 과일 쟁반을 하사받았다. 예종 시기, 평양에 역시 ‘소서시’라는 한 관기가 강도에게 능욕을 당하는 순간 용감하게 반항해 예종에게 포상을 받았다. 세조와 중종 때는 다 ‘취서시(醉西施)’라는 기녀가 있었다. 명종 시기, 의녀 중에 ‘서시’라는 이름을 가진 자가 있었다. 이 밖에 문신 박우의 애첩 이름도 ‘서시’였다. 이로써 조선 시대에 서시는 미인의 대명사가 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반도의 지명에도 ‘서시’와 관련된 곳이 있다. 전라남도 구례군에는 ‘서시천’이라는 강이 있다. 전라북도 군산시, 경상남도 창원시에도 ‘서시포’라는 지명이 있었다. 주목할 점은 서시완사와 서시범주(泛舟) 등 고사가 모두 물과 관련이 있고, 이들 지명 역시 수역 이름이라는 것이다. 권헌의 <진명집(震溟集)> 기록에 따르면 군산의 ‘서시포’ 일대에 미인이 많고 현지 미인을 서시라고 불렸다. 이 밖에 평안도 평양에는 ‘서시원방’이라는 거리가 있었다.


조선반도의 서시 고사 인용과 반성

서시 고사는 정치적 경각심을 일깨우는 데 많이 사용된다. 문인 이삼환은 시에서 ‘경국아미적국자. 주가달기월서시(傾國蛾眉敵國資. 周家妲己越西施)’라고 하면서 서시를 달기와 마찬가지로 나라의 ‘화의 근원’이라고 했다. 남공철은 ‘금범불견수련의, 각억서시취무시(錦帆不見水漣漪, 卻憶西施醉舞時)’라고 하면서 국가의 흥망을 탄식했다. 김도수는 <서시도(西施圖)>라는 시에서 서시는 ‘천 년 망국의 이름’이라고 했다. 문신 정문부는 “사람들은 서시 때문에 나라가 망했다고 하는데 군왕만 취해 이를 모른다”고 말했다.


1476년 조선 성종은 고대 군왕의 비빈 이야기를 수집해 병풍에 그리라고 명을 내렸다. 그중 한 폭이 <오부차도(吳夫差圖)>다. 대신들은 병풍에 남긴 시문에서 서시를 군주를 미혹하고 국정을 교란한 부정적인 인물로 묘사했다. 흥미로운 점은 같은 해 성종은 미인 윤 씨를 왕비로 책봉했는데 이는 이어진 폐비 사건, 더 나아가 연산군 시기의 정치 혼란의 복선이 됐다. 조선 철종은 무절제한 군주였지만 사람을 외모만 봐선 안 된다고 말했다. 서시처럼 예쁘지만 기질이 혼탁하면 사랑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근대 문인 이종린은 서시를 ‘유혹’으로 보고 공부에 방해가 된다며 공부할 때는 미인 서시가 등불을 들어준다 해도 마음이 동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반면 유몽인은 비교적 대범해 ‘욕재서시오호거, 편주하필대공성(欲載西施五湖去, 扁舟何必待功成)’이라는 시를 지었다. 관직과 미래를 탐하느니 범려처럼 서시와 배를 타고 세월을 보내고 싶다는 것이다. 문신 이소한은 첩이 세상을 떠나자 ‘더 이상 서시가 없다’고 한탄했다. 이렇듯 고대 한국인은 서시의 아름다움이 나라를 망하게 했다는 고사 때문에 싫어한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의 대명사로 여겼고, 이야기가 계속 전해졌다.


1933년 <매일신보>는 춘향의 고향 남원에서 빨래하는 여인의 사진을 싣고 ‘서시완사’가 연상되는 제목을 달았다. 한국의 고대 미인 춘향과 중국의 고대 미인 서시가 문화 이미지로 절묘하게 만났다. 지금도 서시 고사를 아는 한국인이 많다. 심지어 중국 우시(無錫) 리위안(蠡園)을 방문하는 사람도 있다. 리위안은 범려와 서시가 배를 타고 노닌 곳이라고 알려진 곳이기 때문이다.


 글|위셴룽(喻顯龍), 상하이(上海)외국어대학교 글로벌문명사연구소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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