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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과 진·한 왕조, 무엇이 같고 또 다를까


2022-12-27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와 한무제(漢武帝) 유철(劉徹)은 비슷한 점이 많다. 두 사람 모두 천재 소년이었다. 유철은 17세에 즉위해 49세 전에 한나라를 강성하게 만들었다. 아우구스투스는 19세에 군대를 일으켜 47세 전에 로마제국의 제도 구축을 완료했다. 두 사람은 또한 복잡하고 모순적인 인물이었다. 유철은 유가사상을 신봉했지만 일 처리방식은 법가에 가까웠다. 그러나 법가라고 해도 진나라 제도로 되돌아가지는 않았다. 그는 도가를 좋아했지만 유가로써 나라를 세웠다. 아우구스투스도 모순이 가득했다. 그는 거두와 협력해 원로원을 무력화시켰다. 또한 원로원과 협력해 거두를 제거했다. 공화정 형식을 남겨 두었으나 군주제를 시행했다. 그는 또한 여러 개의 문관 직책을 맡았으나 그의 진정한 힘의 원천은 군대였다. 아우구스투스와 유철이 복잡했던 이유는 로마와 진·한이라는 초대형 정치체를 통솔해야 했고, 그것은 하나의 이론과 제도, 안배로는 지탱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상층과 기층의 통치

국가 이데올로기를 중시했다는 점에서 아우구스투스와 유철은 견해가 일치했다. 유철은 백가를 물리치고 유학만을 존중한다는 ‘파출백가, 독존유술(罷黜百家, 獨尊儒術)’을 시행해 백성의 사상을 통일시켰고, 아우구스투스 역시 ‘로마 민족’이라는 인식을 내세워 분열주의를 비판하고 국가에 대한 사회의 책임감을 호소했다.


아우구스투스와 유철이 국가 통치에서 취했던 방법과 결과는 크게 달랐다. 아우구스투스는 정치에 대한 상인의 파괴성을 극복하기 위해 그들을 문관 체계로 흡수해 ‘귀족과 상인이 천하를 공유하는’ 국면을 만들었다. 반면 한나라는 문관을 기층에서 선발해 인재를 양성해 ‘평민 정신’을 지닌 왕조를 만들었다.


로마제국의 문관은 속주 수도에 모여 있어 기층으로 파고들지 않았다. 속주 아래에 자치권을 지닌 왕국, 도시, 마을이 있었다. 로마에서 파견된 총독과 재무관은 군사, 사법, 세수만 책임졌을 뿐 공공 서비스와 문화, 교육은 전혀 간여하지 않았다. 그들은 지방 실세의 의견에 따라 지방 사무를 결정했다. 예를 들어 로마 총독 빌라도는 예수를 죽이고 싶지 않았지만 유대 지도자들의 강력한 요구로 어쩔 수 없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지시했다. 지방 도시 건설과 문화 활동도 현지 거상의 자발적인 협찬으로 이뤄졌다. 영국 학자 사무엘 파이너는 로마제국을 ‘수많은 자치시로 구성된 하나의 거대한 지주회사’라고 표현했다.


때문에 로마제국은 환지중해권 상류층 엘리트의 대연합일 뿐 기층 군중은 그 안에 포함되지 않았고 융합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서양 학자의 말처럼, 로마제국 문명은 풍부하나 경제 기반은 초라한 ‘노예제 대장원’이었다. 문화 기반도 마찬가지였다. 로마는 귀족과 관료만이 라틴어를 할 줄 알았고 기층인 군중은 기본적으로 라틴어를 몰랐다. 로마가 그들을 교육할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아우구스투스가 바라는 ‘로마 민족 인식’은 군중의 마음속에 와 닿지 못했다. 상류층이 붕괴하자 기층의 백성들은 각자 살 길을 찾았고 로마는 깨끗이 잊혀졌다.


반면 진·한은 상층과 기층을 관통해 현(縣)과 향(鄉)까지 직통하는 문관 체계를 만들었다. 관청은 기층에서 인재를 모집해 엄격한 시험을 거친 뒤 지방으로 파견해 세수와 민정, 사법과 문화, 교육을 전면적으로 관리하도록 했다. 한나라는 기층에 학교를 설치하고 경서를 가르치는 선생을 배치했으며 전적(典籍) 교육을 통해 다양한 지역의 백성을 하나의 문화 공동체로 묶었다. 따라서 중앙 정권이 붕괴해도 각지의 백성은 같은 문자를 쓰고 같은 도덕을 따르며 같은 문화를 가졌다. 이런 사회 기반 때문에 대통일 왕조가 오래 지속될 수 있었다.


정권과 군권의 관계

로마와 진·한이 두 번째로 다른 점은 군대와 정부의 관계다. 이 두 관계 해결을 위해 아우구스투스가 선택한 것은 ‘군벌’ 방식이었다. 그는 우선 가장 부유한 이집트의 재정을 ‘원수(元首)의 개인 금고’로 몰수했고, 개인 금고의 돈으로 군인의 급여를 지급했다. 이는 두 가지 규칙을 만들었다. 첫째, 군대는 급여를 제일 많이 주는 사람에게 속한다. 둘째, 황제가 급여를 지급하지 못하면 급여를 지급할 수 있는 사람을 황제로 앉힌다. 이런 규칙 아래의 평화는 아우구스투스 이후 50년 동안만 지속됐다. 통계에 따르면 아우구스투스에서 콘스탄티누스까지 364년 동안 평균 6년에 한 번 꼴로 황제가 교체됐다. 그중 39명의 황제가 군대의 손에 죽었다. 이는 전체 황제의 70%에 달했다.


로마제국 말기 경제가 붕괴되고 풍부한 급여가 지급되지 못하자 로마인은 더 이상 군대에 가려고 하지 않아 게르만족 용병을 고용해 ‘집을 지키게’ 했다. 결국 로마를 점령한 것은 바로 이런 용병이었다. 타키투스의 말처럼 로마제국의 비밀은 황제의 운명이 사실상 군대의 손에 달려있다는 것에 있었다.


로마는 왜 군인의 정치 간섭을 통제할 수 없었을까? 제일 중요한 이유는 로마에는 기층 정권이 없었기 때문이다. 총독들은 군대에 의존해 치안과 세수를 유지했고 거둬들인 세금은 다시 군인의 급여로 변했다. 이렇다 보니 중앙을 대표해야 할 총독이 지방 군벌을 대표하게 됐다. 반면 진·한 군대는 세금을 걷을 수도, 민정을 관리할 수도 없었다. 문관 제도 아래서 군대는 전시에는 병사로, 전후에는 농민이 되었지, 로마 군대처럼 이익 집단으로 변하지 않았다.


두 번째 중요한 이유는 로마 군인의 ‘국가 의식’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몽테스키외는 “군대가 로마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로마를 잊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한나라와 서역(西域)은 만 리 거리에 있지만 반초(班超)는 1000여 명의 사병만을 보유했지만 뛰어난 외교 군사 지혜로 서역국의 수십만 군대가 포위한 가운데서도 한나라의 서역에 대한 관할을 재건해 실크로드를 만들었다. 몽테스키외의 말대로라면 반초는 스스로 할거할 수 있었지만 그는 한나라를 위해 30년 동안 서역을 다스렸고 마지막에는 고향에 묻히고 싶다는 바람을 가졌다. 한나라에는 반초 같은 장군이 많았다.


로마 군인이 정치에 간섭할 수 있었던 이유는 로마 황권은 ‘상대적인 전제 정치’이고, 한나라 황권은 ‘절대적인 전제 정치’라 군인이 반정을 꾀할 수 없었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동한 말기 천하가 혼란스러울 때 명장 황보숭(皇甫嵩)은 군대를 일으켜 난을 평정해 전공을 세웠다. 당시 황제가 유약했고 간신들이 정권을 장악한 상황이라 누군가 황보숭에게 이 틈을 타서 병사를 보유해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자기를 보호할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그는 결연하게 병권을 내놓았다.


황권이 강제력이 없는데 황보숭 등 군인은 왜 규칙을 준수했을까? 이는 그들이 스스로 국가 질서에 복종하는 책임 의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에는 번진(藩鎭) 할거와 군벌의 혼전이 있었지만 주류가 되진 않았다. 중화문명의 대통일 정신은 선비의 풍모를 지닌 무장인 ‘유장(儒將)’ 전통을 낳았다. 법가 체계와 유가 의식이 같이 힘을 발휘하는 상황에서 고대 중국은 문관이 군대를 통제하게 됐고, 이는 중화문명의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이 됐다. 키케로의 ‘무(武)는 문(文)에 복종해야 한다’는 이상은 오히려 중국에서 실현됐다.


이 글은 판웨의 <진·한과 로마(秦漢與羅馬)>에서 발췌한 것이다.


글|판웨(潘岳),역사학 박사이고 중국공산당중앙위원회통일전선사업부(中央統戰部) 부부장, 중국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주임·당조(黨組) 서기이며, 중국공산당 제20기 중앙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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