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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우선’인가, ‘질서 우선’인가


2022-06-13      

중국 상고시대에는 제후국이 난립하고 도시 하나가 하나의 국가였다. 그러나 이들 도시국가는 오래가지 못하고 지역적인 왕국을 형성했고 더 나가 통일 왕조로 발전했다.


전국(戰國) 7웅은 서로 싸워도 하나의 질서가 있다는 것에는 공감하고 흩어지는 것이 오래가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반면 같은 시대 그리스의 도시국가의 세상에는 공동 주인이 없고, 각 연맹 간 투쟁만 있을 뿐이어서 ‘공통된 질서’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도시국가 간 관계를 살펴보면, 주례(周禮)에는 ‘한 나라에서 돌림병이나 흉년이 들면 다른 나라가 식량을 빌려주어야 하고, 한 나라에서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 생기면 각국이 달려가 축하하거나 애도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이런 책임은 강제적인 것으로 천자에 의해 유지됐다. 패주도 이 규칙을 지켜야 패권을 누릴 수 있었다. 이는 각국이 ‘화하 세계(華夏世界)’에 속한다는 인식을 강화했다. 반면 그리스의 도시국가 간에는 책임 관계가 없었다. 그리스 식민 도시에서 분화된 대다수 신생 도시 국가들은 조국에 대한 책임과 의무가 없었고 심지어 공격을 하기도 했다. 그리스와 페르시아 전쟁 때 그리스인이라는 공통된 신분도 미미한 역할을 했을 뿐이다.


두 문명의 본성이 다른 두 길을 만든 셈이다.


서방 세계는 분화의 길을 걸어 지역, 민족, 언어적으로 분화를 거듭했다. 그러는 동안 통일의 노력도 있었다. 예를 들어 로마와 기독교의 노력이 있었지만, 분화가 주류를 이뤘고 결국 개인주의와 자유주의로 귀결됐다.


반면 중국은 꾸준히 통합의 길을 걸어 지역, 민족, 언어적으로 통합을 거듭했다. 그러는 동안 분열의 기간도 있었다. 예를 들어 왕조 교체, 유목민족의 충돌 등이 있었지만, 통합이 주류를 이뤘고 이로써 중화 문명 특유의 단체주의를 형성했다.


동서양 정치관념 속 ‘분’과 ‘합’

중화 문명에 ‘분(分)’의 개념이 없었던 게 아니다. 다만 ‘통치 분할’이 아니라 ‘분업’이었을 뿐이다. 순자는 “인간은 유약한 신체로 어떻게 금수에 잡혀먹지 않고 생존할 수 있었을까”라고 질문하며 “인간은 집단을 구성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집단을 구성하는 핵심은 개개인의 사회적 역할을 확립하고 그에 해당하는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데 있다. 분업이 ‘예의(禮義)’에 부합하면 사회를 통합할 수 있다. 따라서 ‘분’은 ‘화(和)’를 위한 것이고, 화는 통일을 위한 것이며, 통일은 강대해지고 강대하면 자연을 개조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합’ 사상이 있었다. 그는 ‘절대 왕권’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즉 군주 한 사람이 씨족이나 도시 전체를 대표하고 전체 인민을 통치하는 권리를 가진다. 가장이 집안을 관리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는 “전체는 부분을 능가하며 이런 탁월한 인물 자체가 바로 하나의 전체이고 다른 사람들은 그의 일부와 비슷하며 시행 가능한 유일한 방법은 모두 그의 통치에 복종하고 다른 사람이 차례로 하는 것과 달리 그가 무기한 통치권을 갖는 것이다”고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절대 왕권’은 알렉산더를 위한 맞춤형 정치 이론으로 그가 진리보다 권력을 추구하는 것을 보여준다고 했다.


알렉산더 사후 아리스토텔레스는 즉각 반격을 당해 아테네의 에클레시아의 심판에 직면했다. 소크라테스도 이 심판으로 독 미나리즙을 마시고 죽었다. 소크라테스의 전철을 밟기 싫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마케도니아로 떠났다. 그의 도망은 아테네의 비웃음을 샀다. 일 년 뒤 아리스토텔레스는 세상을 떠났고 알렉산더 제국은 분열됐다.


마케도니아제국은 정복한 곳에 그리스식 자치 도시를 만드는 확장 방식을 취했다. 이런 ‘자치’는 해당 도시에 거주하는 그리스 식민지 개척자가 대상이었지, 정복당한 토착 사회는 포함되지 않았다. 새로 정복한 아시아 도시에서 알렉산더는 자신의 심복들을 해당 도시의 총독으로 삼고 군사와 세수만 간여하고 민정은 간여하지 않았다. 이런 방법은 중앙이 강력할 때는 유지가 가능하지만, 중앙 권력이 쇠약하면 이탈 세력이 생겨 도시가 통제에서 벗어난다. 따라서 알렉산더 제국의 붕괴는 필연적이었다.


반면 중국 전국시대의 기층 정권 구축 방식은 전혀 달랐다. 출토된 진간(秦簡)에 따르면, 진나라는 합병할 때마다 현(縣)에서 향(鄉)까지의 기층 정권을 구축했다. 현과 향 관리가 모든 민정을 처리하고, 황무지 개간, 호적 통계, 세금 징수, 산물 기록을 담당했으며, 이런 정보를 진나라 수도인 함양으로 보내 책자로 만들어 보관했다. 관리는 한 곳에서 오래 머물지 않고 몇 년에 한 번씩 교체됐다.


동서양 문명의 불일치, 대화의 기본이 된다

인류 사회 발전 과정에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이론이나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원칙은 없다. 현재 동서양의 관념에서 가장 큰 차이는 ‘자유 우선’이냐 ‘질서 우선’이냐다. 이는 각각 그리스 문명과 중화 문명의 핵심 가치관이다.


그리스인은 자유를 매우 중요시해 ‘그리스인’이라는 종족의 이름이 ‘지혜’의 대명사가 됐다. 중국인은 질서를 매우 중요시해 중화 문명은 같은 뿌리와 같은 문화를 지니고, 국가 형태로 오늘날까지 계속된 문명으로 발전됐다.


질서 우선은 안정을 가져오고 자유 우선은 혁신을 가져온다. 둘 중 어떤 것이 더 나은가? 이는 철학, 정치학, 종교학, 윤리학을 포함해 끝없는 논쟁을 일으키는 것으로, 우리는 결론을 내릴 필요가 없다. 이런 ‘다름’을 남겨두는 것 자체가 앞으로 문명의 상호 융합과 배움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이다. 다양성과 갈등의 공존은 인류 문명의 유전자은행에 보다 많은 씨앗을 남겨줄 것이다. 자유 우선과 질서 우선의 견해차는 동서양 문명 교류의 장애물이 아니라, 오히려 동서양 문명 교류의 대화의 기반이 된다. 한편으로 기술 발전이 폭발적인 혁신의 단계로 진입하면서 우리는 자유가 주는 창조력을 깊이 인식했다. 다른 한편으로 비 전통적인 안보 위기가 빈번한 것도 질서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인식하게 한다. 자유는 어떻게 하면 질서를 강화해 와해를 예방할지 진지하게 연구해야 하고, 질서는 어떻게 하면 자유를 강화해 혁신을 자극할지 진지하게 연구해야 한다. 문제는 자유냐, 질서냐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단계에서 자유를 강화하고 어느 단계에서 질서를 강화하느냐를 판단하는 것이다.과거에는 하나의 이론을 검증하는데 수백 년의 시간 동안 수대의 사람들이 시행착오를 거듭해야 했다. 이제는 기술 혁명으로 몇 년이면 맥락을 파악할 수 있게 됐다. 반성하고 포용하며 화합하고 공존하며 서로 배우고 융합하는 문명만이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 이를 위해 동서양은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있다.이 글은 판웨의 <전국과 그리스(戰國與希臘)>에서 발췌한 것이다.


글|판웨(潘岳),역사학 박사이고 현 중앙사회주의학원 당조 서기, 제1부원장(장관급)이며 중국공산당 제17차∙제19차 전국대표대회 대표, 중국공산당 제19기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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